새벽을 '언번들링' 한다면?

새벽 배송의 시대

by 지저귐

음식 사진으로 시작해볼까요?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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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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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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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저희 부부의 '한때' 아침 식사였습니다. 그럴 듯하죠?


좀 건강하게, 그러면서 눈으로도 그럴싸한 식사를 하자며 며칠 간 이런 식으로 차려 먹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제법 우아했던 이 브런치 식단은 그리 오래 가진 못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물리기 시작하더군요. 흰쌀밥에 얼큰하고 시원한 국 한 그릇이 간절해지면서요.


깨작깨작 대던 어느 날 아침엔 저희 집 강아지가 비웃으며 지나가기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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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주일 남짓 이렇게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곁들여 '아침'을 해결했는데도 신기하게도 마트나 시장에 가서 장을 볼 일이 없었습니다.


전날 밤, 꽤 늦은 시간에라도 스마트폰 앱으로 마켓컬리에 주문하면 이른 '새벽'에 가져다주더군요.


스마트폰 손가락질 몇 번이면 신선한 야채나 과일, 고기, 계란, 온갖 냉동식품들까지 불과 몇 시간 뒤인 새벽에 대문 앞에 놓여 있는 시대입니다.




일상이 된 '새벽 산업'


마켓컬리를 예로 들었지만, 새벽배송 물량은 쿠팡 프레시가 더 많다고 합니다. 쓱닷컴과 오아시스마켓도 새벽배송을 하고, 최근엔 네이버 N배송도 새벽 배송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새벽배송을 이용하는 고객 수가 2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통계도 있습니다.


새벽 배송은 이미 우리 먹거리 쇼핑의 한 장르, 일상적 장보기의 한 형태로 자리잡은 상황인 거죠.


이런 상황에서 '새벽배송 금지'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됐으니, 뜨거운 논쟁이 이어진 건 당연해보입니다.


정부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정책을 예고한 것도 아니고, 사업 주체인 기업들이 새벽배송을 그만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결정권이 없는 민주노총이 새벽배송 금지 이야기를 꺼낸 건,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결성된 단체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이해는 됩니다.


수면 이상과 과로로 인한 택배기사들의 건강 문제, 안전사고 위험, 인권 문제 등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제기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 의식을 '금지'로 연결시키는 건 현실성을 따졌을 때 무리로 보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미 2천만 명의 일상이 돼가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소비 문화와 생활 패턴, 식자재 유통 구조 등을 볼 때 새벽 배송은 더 늘면 늘었지, 줄어들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새벽에 신선한 식재료를 문 앞에서 받아 챙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생활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영세 자영업자들도 새벽 배송으로 식재료를 공수하는 경우가 많고, 도서 산간 지역에서도 새벽배송 소비자가 늘고 있는 현실입니다.


소비의 관점이 아닌, 노동의 관점에서도 새벽배송은 불가피한 흐름이 됐습니다.


당사자인 배송 노동자들도 새벽 배송을 선호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합니다. 건당 배송비가 주간배송보다 1.5배 이상 높은데다 교통 혼잡은 없고, 낮시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라고 합니다.


새벽시간 노동이 필수적인 분야는 배송 말고도 이미 오래 전부터 많았습니다.


노동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벽 편의점 영업' 을 금지하고, '새벽 경비 업무' 를 금지하고, '새벽 방송'을 금지할 수는 없는 일 아닐까요?


극단적으로 비약하자면, 경찰관도 새벽 순찰을 하지 말아야 하고 소방관도 새벽 출동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새벽배송은 이제 '금지' 로 접근할 단계를 한참 넘어섰다는 의미있니다.


새벽 배송은 이제 현대 소비사회의 일부라는 점을 전제로 깔고,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해결할 대안을 찾는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인 거죠.


예를 들어 금지를 주장하기보다는 새벽 배송 인력들에 대한 안전 대책과 배달비 인상 등 수익성 향상 대책들을 고민하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이참에 '새벽배송'을 '언번들링'해보면 어떨까요?




언번들링(Unbundling)이란?


언번들링(Unbundling)은 하나의 묶음(bundle)으로 제공되던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요소로 분리하거나 해체하는 비즈니스 전략, 또는 현상을 말합니다.


묶여 있던 가치 사슬이나 기능 중에서 고객이 실제로 원하는 특정 기능, 특정 서비스만을 떼어내서 별개의 제품이나 별도의 산업으로 만드는 개념입니다.


가전제품 시장의 '애프터서비스'를 예로 들어봅니다.


전에는 세탁기나 냉장고를 사면 1년, 혹은 3년 단위로 무상 A/S 기간을 보장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보험료 비슷하게 일정액을 내면 무상 A/S 기간을 더 늘려주는 방식이 많습니다.


무상 A/S 기간 연장이라는 하나의 상품이 만들어진 거죠. 이런 걸 언번들링이라 보면 될 듯합니다.


전에는 항공권에 수하물이나 기내식 등 다양한 서비스가 포함돼 있었지만, 저가항공사들이 기본 요금을 낮추고 부가 서비스는 옵션으로 구매하게 하는 것도 언번들링 사례입니다.


요즘엔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금융(핀테크), 미디어, 교육,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에서 언번들링이 활발합니다.


과거에는 공급자가 여러 항목을 묶어서 한 번에 판매하는 번들링이 일반적이었지만, 번들을 풀어서 각각 파는 언번들링이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언번들링이 성공하면 기업은 새로운 가치가 창출됩니다. 소비자들도 원치 않는 기능이나 서비스는 빼고 필요한 것만 선택해, 그 비용만 지불하면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다만, 기존에는 별도의 비용없이 받을 수 있었던 부수적 상품이나 서비스가 언번들링 될 경우엔 안 내던 돈을 내야 하게 되니, 그건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당에서 추가 비용 없이 딸려나오던 반찬들이 언번들링된다고 생각해보면 짜증이 나겠죠.




사회적 인식에서 '새벽'이 언번들링 된다면...


다시 '새벽 배송' 이야기로 돌아가면요. 이제는 운수산업에서 '새벽' 을 떼어내 별도 산업으로 언번들링하면 어떻겠냐는 생각입니다.


특정 시간대의 배송은 일반적인 배송 사업에서 별도로 떼어내, 낮 시간보다 운임을 훨씬 높이고, 휴식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장하고 건강 관리를 더 챙겨주는 보완책을 만들어 특화시키는 것이죠.


배송뿐 아니라 다른 새벽 노동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지금도 수당이나 대체 휴일 등에서 낮 시간 노동과 차이를 두고 있긴 하지만, 새벽 시간 노동에 대해서는 별도의 임금체계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게 하자는 겁니다.


꼭 임금이나 처우만을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아예 '새벽 노동은 통상적인 노동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로 언번들링하는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