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 등에 올라탄 달팽이의 ‘쇼크’

'경계선'은 어디에?

by 지저귐


달팽이 한 마리가 먼 길을 떠나게 됐습니다.


빨리 가려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사람의 시점에선 아주 느린 속도지만, 달팽이로선 발(달팽이는 발이 없지만, 편의상 발이라 칭한다) 이 아플 정도의 잰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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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언가 (달팽이보다는) 매우 몸집이 큰, 어마무시하게 커다란 동물이 빠른 속도로 옆을 지나쳐갔습니다.


달팽이를 순식간에 앞질러 금세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니, 거북이었습니다.


다시 갈길을 가는 달팽이.


한참을 열심히 걷다 보니, 아니 기어가다 보니, 아까 그 거북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달팽이가 조심스레 부탁했습니다.


"저기... 나 좀 태워주지 않을래?"


달팽이를 쓱 한 번 훑어본 거북은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흔쾌히 답했습니다.


"하나도 안 무거워 보이네. 그래 타라!"


달팽이가 딱딱한 거북의 등에 간신히 기어 올라탄 후 거북은 다시 전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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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쯤 간 뒤, 이번엔 달팽이보다 더욱 힘겨운 행보를 보이는 굼벵이가 거북과 달팽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거북은 '달팽이도 이리 가벼운데 굼벵이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굼벵이에게 너그럽게 제안했습니다.


"야! 너도 탈래?"


굼벵이는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며 꿈틀꿈틀 거북 등에 올라타서는 달팽이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굼벵이가 먼저 올라타 있는 달팽이에게 인사치레 겸 가볍게 물었습니다.


"야, 어떠냐? 편하냐?"


이 말에 달팽이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 긴장된 얼굴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얌마, 꽉 붙들어... 이 XX 겁나 빨러!"




느리면서도 매우 빠른 거북


거북은 매우 느리지만, 또 한편으론 매우 빠르기도 하다

빠르다는 건 누구의 입장에서 빠른 걸까요?


우리가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 하는 것처럼, 달팽이나 굼벵이 입장에선 거북은 엄청나게 빠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토끼를 비롯한 다른 육상 동물에겐 거북이 나무늘보보다 느리게 보입니다.


'빠르기의 정도', 혹은 '느리기의 정도'를 일직선 가로로 표시한다면 중간쯤엔 평균값이 있겠죠. 양 옆으로는 무한대일 거고요.


그 중간값, 즉 빠른 것과 느린 것의 가운데는 처음부터 정해진 걸까요, 아니면 인간의 속도를 중심으로 대충 잡은 지점일까요?


빠른 거나 느리다는 개념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인간이 '평균', 혹은 '보통'이라 부르는, 매우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가상의 기준으로 속도를 분류한 것이죠.


세부적인 속도의 차이들은 빠르다와 느리다는 두 분류에 뭉뚱그려 통합됩니다.


더 세분화해도 기껏해야 '매우 빠른 것', '빠른 것', '좀 빠른 것', '보통인 것', '좀 느린 것', '느린 것', '매우 느린 것', 이렇게 7등급 정도이겠습니다.


달팽이와 굼벵이에게 거북은 빠른 것, 또는 매우 빠른 것입니다. 그러나 달팽이와 굼벵이의 속도 또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개미가 끼어든다면 누가 더 빠르고 더 느린지를 다시 평가해야 합니다.



지구에서 속도는 일정한 시간 동안 갈 수 있는 m, 혹은 km로 측정됩니다.


하지만, 수천만 km, 수십억 km, 수십조 km도 모자라 '광년'으로 측정되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빠른' 교통수단이나 로켓, 우주선까지도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느린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이, 지극히 인간의 기준에서 추상적으로 정도나 강도를 판단하는 건 빠름과 느림 만이 아닙니다.


크고 작음, 많음과 적음, 멀고 가까움, 무거움과 가벼움, 잘생김과 강한 것과 약한 것, 밝음과 어두움, 날카로움과 무딤, 좋고 나쁨, 잘생김과 못생김, 선과 악, 나아가 인간성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등등...


우리가 우리 생각으로 구분을 짓는 이런 '정도'와 '강도'는 사실 경계선이나 테두리를 지어 구분할 가 없는 것들입니다.


기준도 없고 중간도 없고 양 끝도 없는 미적분의 영역입니다.


한쪽 방향의 무한대에서부터 다른 방향의 무한대까지, 마디가 전혀 없이 디졸브로 이어지는 개념입니다. 컷으로 단계를 구분할 수 없는 개념인 거죠.


결국 자연 상태의 현상을 구분하는 '척도'들은 관찰의 위치가 어디고 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불규칙하게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일 뿐입니다.





나누고 가르는 게 불가능한 관념들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들이대는 기준이나 잣대는 그 '구분'과 '분류'의 공허함이 더합니다.


특히 착함과 악함, 미와 추, 진보와 보수, 강하고 약함 등등은 양분하는 게 무의미하고 '세분'을 할라 쳐도 버겁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적 관점에서 '우등과 열등'을 나누는 건 어찌 보면 무형의 폭력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학생들의 인성과 학력 수준은 숫자로 서열을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이런 문제의식은 단지 우리의 의식과 인식의 차원에서만 제기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정책이나 법과도 연관돼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지나 세금, 재정 정책은 상당 부분 '소득 분위'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조 단위 자산의 재벌부터 극빈층까지, 수천만 명의 소득을 대충 열 개 안팎의 '분위'로 뚝뚝 구분해 각종 세금이나 건강보험, 복지 정책들을 실시하고 있죠.


상대적 격차가 큰 사람들을 한 묶음으로 넣어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거북에겐 나무늘보는 먹는 것도 다르고 주거지의 물리적 높이도 다릅니다. 개미와 달팽이, 굼벵이 역시 속도도 조금씩 다르고 살아가는 습성도 다릅니다.


움직임의 속도가 비슷하다고 똑같은 먹이나 똑같은 환경을 주면 안 되겠지요.


경계를 넘어서고 간극을 메꿔야


특히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서 '척도'는 상대적이란 걸 늘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어느 인물이나 특정 단체를 기존의 척도로 쉽게 규정하진 말자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능력이나 됨됨이, 진정성 등은 '좋다, 나쁘다', '뛰어나다, 뒤떨어진다', '높다, 낮다'라고 선 그어 평가할 순 없는 문제입니다.


정치적 집단이나 진영에 대해서도 '급진, 진보, 중도, 보수, 수구', 또는 '극좌, 좌파, 우파, 극우'라는 테두리를 둘러쳐서 불변의 평가 근거로 삼을 순 없습니다.


좋음과 나쁨, 진보와 보수의 정도는 컷으로 나눌 수 없는, 디졸브의 연속이란 걸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평가할 때 적용할 척도에는 각 단위를 구분 짓는 경계가 없어야 합니다.


경계를 넘어서고 없어진 경계선에 생긴 간극을 메꿀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