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면 굴러오는 수레바퀴

깔리지 않으려는 경쟁

by 지저귐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 설레고 즐거운 시기지만 동시에 대입 시즌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수능성적표가 배포됐죠.


올해에도 어김없이 스무 살 전후 청춘들은 가슴 졸이는 대입 경쟁을 치러내야 합니다.


한창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낭만과 감수성에도 젖어들 나이인데, 원점수라든가 표준점수라든가 백분위라든가 등급 컷... 이런 냉정하고 딱딱한 용어들에 매달려야만 합니다.


언론에서는 입시 전문가들의 말을 빌어 어떻게 하면 '입시 전략'을 잘 세울지 연일 보도합니다.




입시(入試)와 '전략(戰略)'


우리 귀에는 '입시'라는 단어와 '전략'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단어인 양 어울리게 들립니다.


그런데 전략이라는 말은 전쟁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나 책략을 말합니다.


아이들이 더 배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려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과 동일시된 것입니다.


이 나라 젊은 청춘들이 굳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연말연시, 그래서 저는 이맘때면 책 한 권이 생각납니다.


출간된 지 벌써 120년이나 지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Unterum Rad>입니다.





"물론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 <수레바퀴 밑에서> 중에서.



<수레바퀴 밑에서>, 혹은 <수레바퀴 아래에서>는 청소년 권장도서나 중고등학생 필독서 목록에 단골로 올라가는 책입니다.


책을 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과연 중고생이 읽어도 괜찮을까', '이게 왜 학교 교육이 권장하는 도서가 됐을까'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처음엔 이 책이 잔잔한 일상의 사색이나 짙은 사유의 과정을 담은 에세이, 일종의 수상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그렇게 느껴졌거든요.


고목 아래에서, 또는 나무 그늘 밑에서, 또는 은은한 촛불 아래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센티멘탈하게 사색에 잠기는 모습이 연상된 겁니다.


'수레바퀴'보다는 '밑에서'에 더 눈길이 간 겁니다.


그러나 <수레바퀴 밑에서>는 그런 낭만적 사색의 에세이와는 거리가 먼 책이죠.


'밑에서'보다 '수레바퀴'란 단어의 의미가 더 큽니다.


1906년, 120년 전에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이 자전적 소설 곳곳에는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의 교육과 입시제도의 현실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문장이 줄기차게 등장합니다.


이런 문장들을 접하다 보면 백여 년 전 독일 교실과 21세기 대한민국 교실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한스입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던 학생이었죠.


이런 애들한테는 어른들의 칭찬과 함께 기대와 요구도 높아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한스는 어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목적이 불분명한 공부에만 매달립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면서 파멸에 이르는 것이 수레바퀴 밑에서의 내용입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교차하는 문장들을 몇 개 살펴봅니다.


"소년은 엄숙한 예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그리스어의 동사를 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학교에서도 그는 눈앞에 놓여 있는 공부 대신에 이미 했거나 아니면 나중에 해야 할 공부를 늘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은 꿈많던 한스의 일상과 정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 시간에 영어책을 꺼내 읽거나 역사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었던 고3 때 기억도 떠오릅니다.


"신학교 가면 다른 애들은 이미 다 공부하고 와서, 니가 따라잡으려면 미리 공부해놔야 한다"


이건 뭐, 우리나라 학원가에서 수없이 들리는 말입니다. 120년 전 독일 작가의 소설에서도 대놓고 선행학습이 등장한 셈입니다.


여기서 신학교는, 지금 우리 현실로 비유하면 과학고나 외고 정도 됩니다.

"왜 한스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밤 늦도록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무엇이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았고 수영과 낚시를 금했는가? 왜 그에게 하찮은 명예심과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휴식을 취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왜, 하고 싶은 것들을 다 제쳐두고 공부를 해야만 하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문장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머릿속으로는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이나 내 주위, 이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또 얼마나 크고요.


그런데 현실은 근의 공식을 알아야 하고 영어 단어들을 외워야만 하니, 얼마나 괴리감이 크겠습니까?


물론 수학과 언어는 사고 능력의 바탕이 되는 것인 만큼 매우 중요한 공부지만, 그 나이에는 그 중요성이 쉽게 이해되질 않겠죠.


"선생님들은 모범생이었던 한스가 하일러 때문에 문제 학생이 되었다고 혀를 찼다. 선생님들은 하일러같은 천재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천재보다 말 잘 듣는 바보 열 명이 훨씬 나은 법이니까. 선생님들이 원하는 건 라틴어를 잘 하고, 수학을 잘 하고 성실하게 규칙을 잘 지키는 학생이다."


한스의 같은 반 학생 중에 하일러라는 친구가 등장하는데, 하일러는 머리가 좋았지만 예술가적 기질이 더 뛰어납니다.


하일러는 학교가 강요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부분 시간을 예술과 사색으로 보냅니다.


한스는 그런 하일러를 '소년 시인'으로 평가하며 동경합니다.


말 잘듣고 공부만 하던 한스가 하일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선생님들은 그걸 '문제'로 진단해 바로잡으려 한 겁니다.


헤세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 체제와 그 경쟁에서 조금만 뒤쳐지면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 직면하는 현실을, 끝없이 우리를 향해 굴러오는 커다란 '수레바퀴(Rad)'로 상징화했습니다.


그 수레바퀴 아래에서 깔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쉴새없이 달려야만 하는 거죠.



한스가 입학한 신학교 교장의 격려가 무심하면서도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그래야지, 기운이 빠져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 거야."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모두 앉은 자세를 유지하며 보면 다들 편합니다.


그런데 둘째 줄 어느 한 명이 좀 더 잘 보겠다고 조금 일어서면 그 뒷사람은 좀 더 일어설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그 뒷사람은 더 높이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하면 결국 맨 앞줄만 빼고는 모두 일어선 채로 영화를 봐야 합니다.


다들 앉으면 편할텐데, 아무리 불편해도 모두가 일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는 거죠.


이런 상황을 지금의 입시 경쟁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수레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길이 없는 상황에서 바퀴만 쉴 새 없이 구르는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방향보다는 굴러가는 것 자체가 중요해보이는 수레바퀴의 악순환은 주인공 한스의 다음 고민에 가장 잘 녹아 있습니다.


"한스는 남들보다 앞서고 싶었다. 물론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그러나 수레바퀴 아래에 비유될 수 있는 건 학교 교육 현장 뿐이 아닙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직장을 다니면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도,

우리는 늘 수레바퀴 아래에서 달리고 또 달려야 합니다.



경쟁 체제라는 바퀴에 깔리지 않으려면 평생을 쉴새 없이, 남들보다 더 빨리 뛰고 더 오래 뛰어야만 하는 숨가쁜 생사의 경주로가 바로 수레바퀴 밑인 겁니다.


그래서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소설은 청소년 권장도서보다는 어른들의 필독서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수레바퀴를 멈춰 세우거나, 아니면 수레바퀴의 궤도 아래에서 벗어나도 아무 문제 없는 사회를 만들거나 하려면 어른들이 수레바퀴의 압박을 더 잘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