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는 목적지에 있을까, 길에 있을까?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여행을 자주 갈 형편은 아닙니다만, 해외여행은 두어 번 가보긴 했습니다.
한 번은 여행사의 '패키지' 관광 상품을 통해, 한 번은 항공권과 숙박, 여행 일정 등 모든 걸 스스로 해낸 '완전한 자유여행'이었습니다.
어느 여행이 더 기억에 남느냐고요?
당연히 자유여행이죠.
프랑스를 갔는데, 이른바 '명소'나 '랜드마크'보다는 거기 사람들이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곳들을 더 많이 다녔습니다.
현지인들이 타는 시내버스와 지하철. 트램을 타고 가다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무작정 내려 낯선 골목들을 거닐었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 다니고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마을이나 가보고, 눈에 띄는 대로 아무 빵집이나 카페에 들러 '파리지앵' 흉내를 낸 기억이 사진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파리 시내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우연히 맞닥뜨린, 어딘지 모를 골목골목들이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설렘과 함께요.
'패키지 관광(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한 기억은? 다들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여정의 상당 시간을 관광버스에서 보냈습니다.
중간중간 '명소'에 내려서 사진 찍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식당과 정해진 가게에 들르고...
정해진 '목적지'들만 점프하듯 둘러봤을 뿐 그 목적지들엔 어떻게, 어떤 경로로 갔는지는 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는 역사학자가 60년 전쯤에 출간한 <이미지와 환상>이란 책이 있습니다.
영상물 등 이미지의 범람과 대중매체의 본질 왜곡 등 사회병리현상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문화 현상을 여행에 비유한,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관광객들은 가고 있다는 경험을 하지 못한 채 목적지에 간다. 그런 관광객에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상에서 다른 장소로 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는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이다. 가까운 곳으로 차를 몰고 갈 때, 교외에 있는 집에서 시내 대학으로 전철이나 차로 출근할 때가, 뉴욕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비행기를 타고 갈 때보다 더 다양한 사건을 볼 수 있고 더 다채로운 장면을 관찰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비행기를 타면 목적지엔 빨리 가지만 어떻게 갔는지 경로는 무의미해집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속도가 빠를수록, 도착까지의 과정은 잘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속도가 엄청나게 높으면 모든 걸 순식간에 지나치게 되고 반대로 속도가 느릴수록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목적지까지의 이동은 더디고 힘들고 불편합니다. 대신 저 먼 풍경부터 발길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까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양옆 길가의 낮은 풀이라든가 그 옆에 핀 들꽃이라든가, 나무 한 그루와 나뭇가지 사이에 튼 새 둥지, 마주 오는 동네 꼬마들 얼굴과 지나쳐 가는 동네 어른들의 뒷모습, 논과 밭, 하늘과 구름을 살피며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빨리 이동했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것들을 느리게 걸으며 관찰하고 사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패키지 관광보다 자유로운 여행이 더 기억에 남고, 명소에서 찍은 사진보다 낯선 골목에서 길 잃었던 일이 더 짙은 추억으로 새겨지는 이유입니다.
관광과 여행은 흔히 같은 말로 혼용되지만, 두 단어의 '의미'는 이렇게 서로 명확히 구분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관광은 자주 못 가지만, 여행은 늘 할 수 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행의 의미가 이동의 과정, 발걸음 하나하나에 있다면, 주위를 관찰하고 사색할 수 있는 매일의 일상 자체가 여행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행은 곧잘 인생과도 비유됩니다. 관광과 여행의 차이점은 그래서 우리 삶에도 대입할 수 있을 겁니다.
'여행의 의미는 목적지에 있을까, 아니면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에 있을까?'
'삶의 의미는 어떠한 결과물에 있을까, 아니면 결과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있을까?'
책 구절 하나 더 인용하겠습니다.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라는 작가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란 책입니다.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상한 제목만큼이나 책 두께도 엄청납니다. 한 평론가는 애정 어린 장난으로 이 책을 <벽돌>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정신병력이 있음을 밝힌 작가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터사이클(오토바이)을 타고 미국을 횡단하면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주된 내용입니다.
저에겐 작가가 던진 아래 두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의 여정을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발걸음 하나하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길 멈추고 그 자체로서 독자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 된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산비탈이지 산꼭대기가 아니다."
가게 될 길을 미리 계획하고 예측하고 대비하면서 목적지만을 바라본다면, 그 여행은 편하고 '무사'할 순 있겠습니다.
하지만 목적지에 닿기까지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는 그저 '수단'으로만 소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사함'이 과연 여행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목적지 자체만을 겨냥해 발걸음을 재촉하기보다는 발걸음 하나하나의 가치를 온전히 느끼는 것,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의 감각에 충실하는 것, 여기에 여행의 의미가 있음을 역설하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문장은 세상과 삶을 여행에 빗댄 은유입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는 언젠가 도달해야 할 '꼭대기'보다는 때로는 곧고 때로는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순탄하고 때로는 거칠기만 한 '길' 곳곳에 숨어 있다는 의미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