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자, 알바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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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의 두꺼운 통창은 도시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지만, 말자의 귓가에는 여전히 "학생"이라 부르던 직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말자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는 대신, 아직 풀지 않은 짐가방 옆에 꼿꼿이 서서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응시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를 적셨다. 70년을 묵혀온 갈증이 가시고 나자, 비로소 날 선 현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방금 지윤에게 내뱉은 말들은 단순히 젊어진 몸에 취해 내뱉은 몽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을 누군가의 배경으로, 누군가의 그림자로만 존재했던 한 여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 자리를 되찾겠다는 처절한 선포였다.
"엄마, 아니... 말자 씨. 진짜 괜찮겠어? 공부며 알바며, 그거 말처럼 쉽지 않을 거야. 요즘 애들 얼마나 영악한데. 몸만 젊어졌지 세상은 엄마가 살던 때랑은 딴판이라고."
지윤의 걱정 섞인 목소리에 말자는 컵 속의 얼음을 아작 깨물어 삼켰다.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머릿속을 날카롭게 깨웠다.
"지윤아, 나는 평생을 '나중에'라는 말 뒤에 숨어서 살았다. 너희들 다 키워놓고 나중에, 네 아버지 퇴직하고 나면 나중에, 집 한 칸 마련하고 나면 나중에.... 그렇게 '나중에'만 찾다가 정신 차려보니 내 이름 석 자는 죽어서 장례식장 명패에나 쓰일 물건이 되어버렸더구나. 그런데 하늘이 됐든 귀신이 됐든, 나한테 다시 기회를 줬어. 이건 그냥 회춘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다시 증명해 보라는 숙제 같은 거야."
말자는 창틀에 컵을 내려놓고 자신의 팽팽한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와 탄력 있는 근육이 여전히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낯설었지만, 그 아래 흐르는 피는 분명 70년 전보다 훨씬 뜨겁고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세상이 공짜로 이 시간을 돌려줬을 리 없지. 이 젊음은 나에게 가장 달콤한 선물인 동시에, 가장 혹독한 시험지다. 남들은 그저 가장 예쁠 나이라고 좋아하겠지만, 나는 이 예쁜 껍데기를 이용해서 가장 치열하게 바닥부터 구를란다. 내 손으로 땀 흘려 번 돈으로 등록금 내고, 내 머리 싸매서 배운 지식으로 당당하게 내 자리를 만들 거야. 누구의 부인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오로지 '이말자'라는 인간이 세상에 나와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거든."
말자의 시선은 창밖, 수많은 불빛이 바다처럼 일렁이는 도심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저 무수한 불빛 중 하나는 반드시 타인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온전히 밝힌 것이어야 했다. 그것이 말자가 이 낯설고도 찬란한 젊음을 기꺼이 짊어지기로 한 진짜 이유였다.
"그리고 지윤아, 나중에 내가 진짜 나로서 우뚝 섰을 때... 그때 만나는 사람은 내 쪼그라든 손마디나 굽은 등 뒤에 숨겨진 희생을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 눈속에 담긴 이 불꽃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 한 번은 만나봐야 '나 이말자로 잘 살다 간다' 말할 수 있지 않겠니?"
말자는 짐가방 깊숙한 곳에서 낡은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70년의 세월을 견딘 낡은 수첩 위로, 스무 살 이말자가 써 내려가는 첫 번째 인생 계획표가 시작되었다. '1. 편의점이나 카페 알바 알아보기', '2. 검정고시 및 대입 정보 확인'. 투박하지만 힘 있게 꾹꾹 눌러 쓴 글자 위로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다음화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