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껍데기는 청춘, 알맹이는 연륜
AI 이미지 Gemini.
오피스텔을 나서는 말자의 발걸음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70년 동안 몸에 배어 있던 구부정한 자세를 꼿꼿이 펴고, 마치 모델이라도 된 듯 당당하게 허리를 세웠다. 하지만 현관문을 나선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말자는 높은 유리벽 앞에 멈춰 선 기분이 들었다. 창밖으로만 보던 도시는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아니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장치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번화가의 대형 카페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세련된 몸짓으로 기계를 다루고 있었다.
"저, 여기 사람 구한다고 해서 왔는데요."
스무 살로 돌아온 말자의 고운 얼굴 덕분인지, 젊은 점장은 반갑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경력은 좀 있으세요? 포스트기 써보셨어요? 저희는 메뉴가 많아서 레시피를 빨리 외워야 하거든요."
말자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포스'는 뭐고 '레시피'는 또 뭔지. 시장통에서 손으로 거스름돈을 척척 내주고, 눈대중으로 간을 맞추며 살아온 세월이 순식간에 쓸모없는 옛날이야기가 된 것 같았다. 점장이 내민 태블릿 화면 속의 복잡한 그림들은 말자에게 도무지 알 수 없는 암호처럼 보였다.
"배우면 금방 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손이 아주 야무지거든요."
"죄송해요. 저희 매장이 워낙 바빠서 바로 일할 분이 필요해서요."
점장의 미소는 친절했지만 대답은 차가웠다. 말자는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뒤로하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젊음이라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세상이 환영해 줄 줄 알았건만, 현실은 자격증 없는 뜨내기를 대하듯 냉정했다.
말자는 길가 벤치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1. 편의점이나 카페 알바 알아보기'라고 적힌 글자 옆에 작은 가위표를 쳤다.
"세상아, 네가 아무리 똑똑한 척을 해도 이말자가 여기서 주저앉을 줄 아느냐."
말자가 다시 찾아간 곳은 화려한 거리 뒤편, 낡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은 시장 근처의 24시간 해장국집이었다. 진동벨도, 주문 기계도 없는 곳. 대신 뚝배기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뒤섞인 그곳에서 말자는 앞치마를 질끈 묶었다.
"아가씨, 여기 진짜 힘들 텐데?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가는 애들이 수두룩해. 월급은 다음 달 지정된 날짜에 나가는 거 알지?"
땀에 젖은 식당 주인이 미심쩍은 눈으로 묻자, 말자는 고무장갑을 끼며 단단하게 대답했다.
"사장님, 저 보기보다 뼈가 굵고 힘 좋습니다. 바닥 닦고, 설거지하고, 손님들 비위 맞추는 거… 그런거 자신 있어요 돈이야 제 날짜에 주시면 되니, 일단 오늘 하루만 시켜봐 주세요."
그날 밤, 말자는 말 그대로 '바닥부터' 굴렀다.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고, 기름기가 꽉 찌든 뚝배기를 수백 번 문질러 닦았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팽팽하던 종아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힘들수록 말자의 눈빛은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새벽 5시,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서는 말자의 손등에는 옅은 락스 냄새가 배어 있었다. 비록 당장 손에 쥐어진 돈 봉투는 없었지만, 말자는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묘한 자신감을 느꼈다. 이건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기다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이었다. 오로지 '이말자'라는 이름으로, 이 젊은 몸을 부려 정직하게 버텨낸 첫날의 훈장이었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말자는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다시 수첩을 꺼냈다.
'1. 해장국집 알바 시작 (한 달 뒤 내 손으로 번 첫 월급이 나온다!)'
그 밑에 말자는 힘을 주어 다음 문장을 꾹꾹 눌러 적었다.
'2. 월급날까지 기다릴 것 없이, 내일은 지윤이한테 빌려서라도 검정고시 문제집부터 산다. 나중은 없다. 무조건 지금이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남의 빛을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타오르기 시작한 말자의 진짜 첫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