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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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자가 오피스텔 문을 박차고 나간 지 어느덧 1년이 흘렀다. 그사이 세상은 그대로인 듯했지만, 말자의 인생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엄마! 이거 엄마 이름 맞지? 서울대학교 이말자!"
새벽 해장국집, 같이 뚝배기를 닦던 동료가 태블릿 화면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말자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 속 이름을 쓸어내렸다. 70년 인생의 고비마다 삼켜야 했던 말들이 문장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일까.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단숨에 통과하더니 대망의 수능에서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둔 결과였다.
"엄마! 대박! 나 소름 돋았어. 진짜 붙었네?"
합격 통지서를 확인한 날, 지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말자의 손을 꽉 맞잡았다. 말자는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젊어진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은 그간의 고통을 씻어내는 듯했다. 이건 단순히 대학 간판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평생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만 불리며 지워졌던 이말자라는 석 자가 세상 앞에 당당히 되살아난 증명서였다.
지윤이 눈물을 닦아주는 말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엄마, 이제 대학생도 됐으니까 말투도 좀 고쳐야겠다. 70대 할머니 말투 쓰면 좀 이상하잖아.. 그리고 밖에서는 내가 엄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금 우리 완전 자매 같거든. 엄마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걸? 그냥 언니라고 부를까?"
말자는 지윤의 말에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는 무슨..." 하면서도 말자의 눈빛엔 묘한 설렘이 서렸다.
그사이, 말자가 떠난 집구석은 적막과 고통만이 감돌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아빠의 수발은 이제 고스란히 백수였던 아들의 몫이 되었다.
"아, 진짜! 엄마는 전화기 꺼놓고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빠의 기저귀를 갈다 말고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아들은 아빠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아빠라는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평생 엄마를 부려 먹기만 했던 아빠. 그런 아빠 곁에서 엄마는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 아버지는 좋았겠네. 엄마가 다 해줘서. 근데 엄마는 어땠을까."
아들은 결심한 듯 낡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까지 이렇게 무너질 순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아들은 아빠를 잠시 맡기고 집 근처 직업 전문학교로 향했다. 엄마 없는 빈자리에서 아들은 비로소 제 인생을 스스로 굴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말자는 이제 해장국집 앞치마 대신 신입생 과잠을 입을 준비를 마쳤다. 낡은 수첩 첫 장에는 '서울대 입학식 가기'와 '내 인생을 담은 첫 소설 완성하기'라는 목표가 적혔다. 말짜는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리라 마음먹었다.
말자는 이제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조연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연으로 서울대학교 교정을 밟을 준비를 마쳤다. 말자, 그녀의 1학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