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증명하는 법
AI 그림 Gemini.
박 팀장이 감사실로 끌려간 뒤, 이 상무는 그가 어질러놓은 책상을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직원들은 이미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를 이름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흔들렸던 조직을 다시 하나의 목표로 정렬시키는 일이었다.
이 상무는 준우가 정리해 온 하반기 전략 리포트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준우 씨, 박 팀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효도 상품'이니 '실버 마케팅'이니 하는 단어들, 오늘부로 우리 팀에서 금지어입니다."
준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창밖의 도심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젊음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비하는 액세서리가 아니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삶을 끝까지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이지. 그러니 효도 상품이니 실버마케팅이니, 이제 이런 거 다 필요 없는 거예요."
준우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이 상무의 과거가 무엇이든, 그녀가 보여주는 비전만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준우 씨, 지금 바로 이사진들에게 소집 공고 보내세요. 10분 뒤 대회의실입니다."
이 상무의 명령에 준우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 상무의 걸음걸이에는 20대의 탄력과 60대의 신중함이 기묘하게 공존했다. 그곳에는 박 팀장의 폭로를 빌미로 그녀의 자격을 논하려던 이사진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는 해명 대신 압도적인 수치가 적힌 신규 프로젝트 기획서를 테이블 중앙에 내리쳤다.
"제 과거가 궁금해서 모이신 거라면 시간 낭비 하셨습니다. 그런 건 흥미 위주 가십지에나 어울리는 주제죠. 하지만 여러분이 이 회사의 수익과 미래 가치에 관심 있는 '투자자'라면, 지금 이 페이지를 보셔야 할 겁니다."
스크린 위로 박 팀장이 비리로 누락시켰던 원본 데이터를 가공한 새로운 시장 분석표가 떴다. 이사진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름이 무엇이든, 제 얼굴이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이 자리에 앉힌 건 제 과거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제 실력을 믿어서였으니까요. 이제 답하시죠. 제 과거를 캐는 데 시간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이 판을 키우시겠습니까?"
가장 완고했던 최고령 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상무의 당당함 앞에 '사기 취업'이니 '정체성'이니 하는 논의는 한낱 먼지처럼 흩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나가는 이사진들의 등 뒤로, 준우가 이 상무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다음 일정을 보고했다. 이채원은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을 찾는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직접 리드하는 리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