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각자의 자리에서
AI 그림 Gemini
준우 씨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진 후, 채원이의 집에는 평온한 일상이 찾아왔다. 그사이 채원이만큼이나 아이들의 삶도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한때 생계를 위해 물류 창고에서 거친 일을 하며 밤낮없이 고생했던 아들 강수는, 이제 어엿한 벤처 기업의 회사원이 되었다. 깔끔한 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채원이는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딸 지윤이 역시 능력을 인정받아 이전보다 훨씬 좋은 직장으로 자리를 옮겨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한 강수가 거실에 앉아 있는 준우 씨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준우 씨, 시간 되시면 집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어떠세요?"
두 남자는 밤바람을 맞으며 마주 앉았다. 강수는 물류 창고에서 일하던 시절의 거친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며 준우 씨의 잔을 채웠다.
"솔직히 물류 창고에서 박스 나르며 살 때는 제 앞가림하기도 벅찼습니다. 엄마가 젊어지셨을 때도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고요. 하지만 이제 제 자리도 찾고 보니 보입니다. 엄마가 지난 세월 우리를 위해 뭘 포기하고 사셨는지... 그리고 준우 씨가 엄마 옆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셨는지요."
강수는 '아빠'라는 호칭 대신 묵직한 신뢰를 담아 잔을 내밀었다. 준우 씨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잔을 받았다.
며칠 뒤, 지윤이는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준우 씨의 넥타이를 사 왔다. 새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좀 애매하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빠라고 부르기엔 제가 너무 다 컸잖아요. 그래도 엄마랑 같이 계셔주셔서 든든해요. 이건 제 성의예요."
다 큰 자식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준우 씨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채원이는 물류 창고의 먼지를 털어내고 당당한 사회인이 된 아들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딸을 보며 비로소 안도했다. 70대 노인으로 살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평범하고도 성숙한 '어른들의 가족'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