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오션 헤엄치기 01

by 모쿠웍스

"아, 제가 몇 달 전에 퇴사를 해서요."


첫 회사에서 만난 외국인 과장님. 얼마 전까지 이 분이 내 유일한 사이드잡 채널이었다. 한 동안 연락이 없어 내가 안부 인사 겸 먼저 연락을 드린 참이었다. 세 달에 한 건이라도 작업 의뢰를 주시던 분이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사라졌다.


나는 서울의 한 디자인 전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경력 4년, 디자인과 무관한 전공이지만 국가 지원금으로 학원에서 툴을 배워 취업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두 번째 회사다. 공식적으로는.


다행히 디자인이 재미있다. 음악 그만두고 디자인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첫 월급이 180만 원이었는데, 취업 전 4년 동안 음원 발매, 공연 등 활동으로 얻은 총 수익이 180만 원 언저리일 거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안타까운 월급이지만 나에겐 거금이었다. 해가 가고 몇 차례 재계약하며 연봉도 올랐다. 분명 받는 돈은 늘었는데, 갈수록 부족한 느낌이다. 부족해도 다들 그렇게 사니까. 현실에 적응해야지. 예전에 비하면 성장 욕구와 호기심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꿈꾸던 삶에서 멀어졌다.


내가 꿈꾸던 삶. 좋아하는 일을 오래, 건강하게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많은 걸 경험하는 것. 정말로 멀어지기도 전에 포기한 거다. 현실에 적응하는 것과 타성에 젖는 건 다르다. 꿈꾸던 삶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본다. 월급 외의 추가 수익, 회사 업무 외의 더 많은 경험. 내 결론은 점프 이직이었지만 실패했다. 차선책인 사이드잡으로 눈을 돌렸다.


크고 작은 디자인 공모전에 열 번 도전하면 열 번 떨어졌다.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돌아오는 건 없으니 자연스레 크몽에 눈이 갔다. 사실 처음에 크몽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크몽을 안 할 핑계가 많았다. 이미 레드오션이어서, 기존에 형성된 단가가 너무 낮아서 등등... 일단 시작하자. 한 건이라도 하면 안 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으로 서비스를 런칭했다.


크몽에서 나를 찾기란 쉽지 않다. 먼저 크몽에 접속한다. 디자인 카테고리로, 그 아래 인쇄/홍보물 페이지로, 또 그 아래 전단지/포스터 항목으로 이동한다. 다음 페이지 버튼을 이백 번쯤 누르면 거기에 내 서비스가 있다. 제목은 “완성도 끝판왕! 맞춤 인쇄 디자인”. 리뷰 0개.


런칭 후 보름이 지났을 때 첫 문의가 들어왔다. 모 학회의 오프라인 행사 디자인을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드디어 시작됐다는 생각에 설렜다. 이 사람은 리뷰 하나 없는 나를 어떻게 믿고 의뢰한 것인가, 혹시 크몽 얘기를 들은 친구 중 누가 날 도와주려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곧 잊었다. 크몽으로 떼부자가 될 거라는 망상에 흥분했다. 안녕하세요, 문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느낌표를 찍었다가 지운다. 이런 말투는 프로답지 못하다. 상대의 물음은 간결하다. 나의 답변은 열 마디가 넘는다. 답변은 챗지피티에게 시키자. 프로페셔널하면서 친절한 말투로 답변해줘. 이 놈은 나보다 말이 많다. 너무 길어, 최대한 간결하게 써 줘. 출력된 프로페셔널하면서 친절하고 간결한 답변을 상대에게 보낸다. 그가 서비스 금액을 결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