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선생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by 우물 안 개구리



바야흐로 소재 고갈의 시기가 닥쳤다. 끊임없는 병렬독서로 한 권도 채 마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본격 새 일을 시작하면서 근본적으로 읽을 시간이 부족해진 것이 두 번째 변명이다. 집어넣는 양이 줄면, 자연스레 나올 말도 줄어드는 법. 어디 산속에 들어가 며칠이고 책만 읽으면 딱 좋겠지만, 아쉽게도 현실이 내 발목을 잡는다. 이럴 땐 간편하게 한 끼 식사하듯 후루룩 마셔 버릴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애초에 없긴 했지만 잃어버렸다고 자꾸 주장하고 싶은 내 필력도 돌아오게 할 든든한 한 끼 책이 간절했다.


그런 의미에서 책장 한편에 꽂힌 채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를 집어 들었다. 신경림 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에세이집이다. 선생께서 책머리에 밝혀 놓은 바와 같이 옛 어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공부해 왔는지 알려주기 위해 어린 시절을 다룬 것이 1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정주, 천상병 등 시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루어 문단의 풍속도를 알리려는 것이 2부 내용이다.

나에게는 이러한 선생의 일화들이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 들렸다. 고모를 좋아했고 혼담까지 오갔던 선생님 덕분에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었던 일, 일제 치하에서 황국신민 만들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해방을 맞이하고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에 벗어난 사람들의 흥에 겨운 몸짓이 어떠했는지. "할아버지가 옛날 얘기 한번 해주련?" 하며 조곤조곤 들려주신 옛이야기들은 나로 하여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절을 잠시 엿보게 했다. 일본 순사가 지나가면 너무 무서운 나머지 부엌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곤 했다던 우리 외할머니의 어린 시절도 함께.

2부에선 시인으로서의 선생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이미 다룬 적이 있는 시집 ⟪농무⟫의 탄생기부터 영어강사로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배고픈 시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다시 시작하고 쓴 글이라 하시니 한 문장, 한 문장이 소중했다. 또한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나봤던 시인들이 아니라, 같은 업계(?) 사람인 선생이 바라보는 그들의 에피소드는 가슴 한편을 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작년 5월 선생이 작고하셨단 기사를 접했다. 본인의 삶이 "남의 흥미를 끌 정도로 화려하지도 못했고 또 기록으로 남길 만큼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지만, 재미와 의미 모두를 잡은 글이었다. 때로는 키득거리게 하고, 때로는 눈물이 핑 돌게 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쭉쭉 읽히는 필력이야 두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직접 선생의 목소리로 듣고 싶을 만큼 생생한 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요청조차 해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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