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영화 감상 후기

영화 <8번 출구>, <웨폰>, <허니 돈트!>, <흐르는 여정>

by 우물 안 개구리


난생처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했다. 23년 8월 잠시 속박에서 풀려 났을 때 이번만큼은 꼭 도전해보리라 했던 결심이 한번 무너진 이후로, 재도전이었다. 엉망인 예매 시스템 속에서 30분 정도의 사투 끝에 미드나잇 패션 1을, 일요일 아침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들어간 예매창에서 <흐르는 여정>을 건졌다. 참고로 나는 여행이나 휴가 등 특별한 쉼에 컨셉을 잡을 때가 있는데, 이번 부국제는 '나를 향한 위로'였다.



1. 미드나잇 패션 1


무려 두 편의 호러 영화가 담긴 새벽 일정이 무슨 위로냐 하겠지만, 인생이 팍팍할 때 무서운 영화만큼 위안을 주는 것도 없다. 힘들 때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소재라면 어떤 거라도 좋은데, 나는 그 괴리를 크게 증폭시켜 주는 게 호러 영화였다. 소복 입은 귀신이든 전기톱을 든 살인마가 됐든 차이가 클수록 효과는 좋았다.



1) 영화 <8번 출구>


익히 알고 있는 소재, 예상되는 전개의 영화였다. 동명의 원작 게임 '8번 출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유튜브 영상을 통해 어느 정도 놀라는 포인트나 효과를 알고 있었고, 이는 장점이자 단점으로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쫄보인 나는 이미 두 차례 영화관에서 소리 지른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안 놀랄 수 있었던 게 좋은 점(이라고 말했지만 놀라서 쥐고 있던 물병 흔든 게 함정), 하지만 다 알고 보니까 재미는 덜했다는 게 단점이었다.

나처럼 나올만한 요소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만의 차별점을 만들려고 다른 스토리를 추가한 듯하다. 그러나 그게 나한테는 별로였다. 전 여자친구와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을 것인지, 계속 헤매는 미로 안에서 인간성을 간직할 것인지 이런 류의 문제를 넣어서 내용이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 같아 아쉬웠다. 휴머니즘 영화에 호러 한 스푼인지 호러 영화에 휴머니즘 한 스푼인지... 뒤엉켜서 정체불명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비추인 영화.

여담으로 자리가 두 남성 관객 사이였는데, 두 분도 나만큼이나 만만치 않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크게 한숨을—때로는 개 큰 콧김을— 정말 자주, 번갈아 쉬셨다. 난 또 그게 웃겨서 버티면서 볼 수 있었다.



2) 영화 <웨폰(weapon)>


가장 기대했던 영화. 홈페이지에 올려진 사진만 보고 "이거다!" 싶었다. 128분 동안 내내 질주하는 느낌으로 봤다. 한 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고, 행여 소리 지를까 싶어 입을 틀어막고 감상했다. 아동학대가해자를 부두교 술사에 비유해 아이의 부모를 비롯한 주변인들을 사로잡는 과정, 그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됐던 아이의 모습을 호러로 잘 풀어냈다. 말미에 잔인한 순간을 카타르시스로 전환시킨 것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공포영환데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한 거냐고! 10월 15일 개봉이라는데, 꼭꼭 많이들 봤으면 좋겠다.



3) 영화 <허니 돈트!>


영상미가 돋보였던 영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가렛 퀄리 화보 영상이라고 해두고 싶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정말, 잘 담았다. 반면에 스토리는 소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단순하다.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 탐정의 범인 찾기. 근데 그 과정에서 섹스씬이 불필요할 정도로 많았던 것 같다. 또 크리스 에반스는 관객들을 낚는 미끼였던 것일까. 그의 마약 사업은 맥거핀(Macguffin)이었을까. 새벽에 졸음을 참아가며 봤던 영화라 그런 건지 몰라도, 보긴 봤는데 뭘 본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뭐, 내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겠지.




2. 영화 <흐르는 여정>


사실 신의 계시라기보다는 일요일 출근이 괴로워서 힐링하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예매했다. GV였는데 자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영화 중간중간에 주인공 춘희가 어디론가 보낸 편지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오는데, '스위스'가 나오자마자 그녀의 마지막 여정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영화 끝나는 내내 울었다. 평소 가족들한테 우린 한날한시에 죽어야 된다고 강조했던 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시 만날 수 있다며 슬퍼하지 않던 나. 그런 경험들이 겹쳐졌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됐다.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생일날 끓여준 게장 레시피는 절대 알고 싶지 않고, 여전히 한날한시에 죽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도 덤이라면 덤. 아울러 춘희가 얘기한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단순히 죽음과 관련된 대사가 아니라 계속 영화를 하고 싶고, 관객을 만나고 싶은 감독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다른 좋은 영화로 만나볼 수 있길 나도 바라본다.



새벽 다섯 시, 영화가 끝나고 쌀쌀해진 공기에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아이스 초코 라테를 마시며 걷는 해운대 아침 바다가 그리도 좋았다.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던 해안가를 따라 걸으면서 문득 행복하다고 느꼈다. 밤 열한 시, 영화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한참을 울고 팅팅 부은 두 눈과 다르게 마음은 깨끗하게 씻긴 기분이었다. 간만에 달게 잤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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