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논문 읽기. 1

논문 <말할 수 없는 목소리의 '말하기'와 자기재현>

by 우물 안 개구리


하나쯤 외우고 있는 시가 있어 멋져 보이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수험생 시절, 3월부터 거의 매달 한 번씩 치러지는 모의평가와 피날레인 수능 덕택에 갖가지 문학을 접할 기회는 충분했다. 그러다 보면 눈에 익고, 외워지는 시들이 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대신 말해주는 내 마음 같은 글귀들이 맴돈다. 신경림의 ⟪농무⟫가 그러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 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분이 얼룩진 얼굴로"부터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를 거쳐,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까지 읽으면 절로 감정이 고조된다. 농민들이 분노와 분칠로 점철된 얼굴을 하고서 삶의 회한과 울분을 터뜨리는 게 퍽 와닿는다. 나는 얼굴에 분을 바르지도, 농사를 짓지도 않지만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자조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마다 어김없이 이 시를 떠올렸다. 특히 화가 올라올 때면 "분이 얼룩진 얼굴"을 생각하며 해당 구절을 입에 넣고 곱씹어보기도 했다.


위 논문을 읽게 된 거창한 이유는 없다. 단지 내 마음속에 머물던 시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좀 궁금했을 뿐이었다. 역설과 대비, 은유 같은 수험적인 접근이 아닌, 우리 문학을 공부하시는 분이 생각하고 분석한 시는 어떤 건지 알고 싶었다. 달리 말하자면, 문학이 가진 새로운 면모가 보고 싶었다.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시집 ⟪농무⟫에 등장하는 농민, 장꾼, 광부, 노동자 등은 타자화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70년대 독재 치하에서 말하는 법을 빼앗겨 버린, 말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지식인 또는 주변인들에게 대신 목소리를 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조차 현실에선 힘없는 약자에 불과했다. 한편 폭력적인 권력 속에서 "혀가 잘린" 사람들은 말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침묵하게 된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응어리를 감출 수 있을까? 다른 방식으로 목소리를 전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신체적 언어로써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주먹을 쥐고, 발을 구르고 때로는 울면서 부당한 현실을 토로한다. 결국 이러한 간접화법 역시 자기재현의 한 방식으로 보아야 함을 역설하면서 글이 마쳐진다.


이를 통해 그들의 울분이 고스란히 마음에 전해졌던 이유가 납득됐다. 울부짖고, 고갯짓을 하는 자조적인 모습이 어떻게 분노로 이어지게 되는지, 왜 신경림 선생의 시들이 약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지도.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큰 울림을 주는 때가 있는데 선생이 자주 사용한 '주먹', '발 구르기', '울부짖기' 등이 그에 부합하는 좋은 예였다. 아울러 선생이 낮은 삶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를 쓴 사람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그 억울함을 잘 대변할 수 있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언제나 가슴으로만 흡수하는 장르라 여겼던 시가 새롭게 다가온다. 학문적인 시각에서 접근해 한 꺼풀씩 벗겨 보고, 파헤쳐도 보는 게 시를 향유하는 또 다른 재미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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