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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의 천방지축 유럽여행기(2)

영국에서 프랑스로

유럽의 첫 관문인 히드로공항의 입국심사대 인터뷰를 10여 분만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단지 입국당일의 런던 숙소 미예약의 문제로 두세 배의 입국심사 시간을 더 허비해야만 했다.

유럽에서 첫 입국심사는 엄격한 것 같았다.  그다음국가부터는 이렇다 할  입국심사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홀로 영국 입국과정에서 숙소문제는 유스호스텔 이용권만으로 해결된다고  믿고 입국한 것이 하나의 착오였다.


이 때문에 입국심사관 흑인여성의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랭한 표정, 그리고 같은 내용의 반복적  질문과 .그대답을 낱낱이 기록하는 태도 등은 난생처음 해외여행인  나에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왕복 항공권을 꺼내보이고  귀국날짜와 여행기간과 정확히 일치하는 고가의 유레일패스, 그리고 브리티시레일패스를 대조시켜야만 했다. 또한 이른 새벽 입국으로 충분한 숙소예약시간이 있음을 설득함으로

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요즘 같은  인터넷시대였다면 즉석 숙소예약도 가능했겠지만 삼십여 년 전 일이다.

이렇게  공항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잠재우고 파운드화 환전을 한 후

런던지하철 티켓을 구매하였다.


런던시내의 유스호스텔이 가까운 킹스크로스역으로 향하는  

런던지하철에 올랐다.

런던도심으로 향하는 도중 원색의 박공지붕주택들과 초원 위의 도시풍경은 이국적인 감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드디어 런던에 입성하게 되었다.  도심 유스호스텔에 머물며 4일간 런던의 대영박물관등 주요 명소와 근교의 옥스퍼드 등을 방문했다.


주요 관광지를 갈 때마다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고  일본어, 홍콩의 광동어가 들렸다.

그리고 한국의 학생여행객 한두 명과 온종일 동행하며 관광과 식사를 같이 한 날도 있었다.


런던에서의 여행은 일단 순조로웠다. 영어의 본고향인지라 한국의 그간 영어교육이 구어체에

약했다 할지라도 십 년 이상을 영어와 씨름하며 살았기에 거리의 다양한 영문표시가 크게 낯설지 않았다.

머릿속 언어의 사고체계조차도 하루하루 영어식 화 되는 기분이었다.


 런던이 친근해졌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노란색 이방인의 서툰 질문에도 매우 친절하게 답해주고 십여분을 동행하며 안내해주던 원숙한 런던의 한 숙녀분 때문인지도 모른다.


런던도착  다섯째 되는 날이다.

9월 초인데도 서울과는 다르게 아침기온이 다소 하고 안개도 약간 낀 날씨였다.

인터시티 장거리열차를 타고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로 향했다.

영국열차는 당시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여섯 시간 동안 영국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며

영국의 대자연을 조망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이르기 전까지는 대부분 차창밖 경관은 낮은 구릉성의 밋밋한 언덕과 초원, 경작지 그리고 한적한 중소도시들이 반복적으로 스쳐지나갔다.

원추형의 높은 산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창밖의 정적인 풍경만으로는 세계를 제패하던 팍스브리타니카가 쉽게 와닿지 않았다.


글라스고우와 에딘버러에서 이틀을 보냈다. 산업도시 글라스고우의 시내를 거닐며 의외로 다소 많은 인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패스트푸드점에 들렸을 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영국식 영어를 접하기도 했다.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스코틀랜드에는 영어사투리 켈트어 가  남아 있다고 했다.


한 시간여 달리던 기차는 긴 지구대  골짜기에 자리한 에딘버러 역에 도착했다.

북구의 아덴이라고 부르는 에딘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주도르써 정말 그리스양식 돌기둥 신전이 언덕 위에 남아 있었고 로마시대 유적과  명소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멀리 시선을 돌리니 하이랜드로

불리는 고원지대인 산악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조롭고 쓸쓸하게 보이는 북구의 에딘버러 해변에 한동안 앉아서 북해를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학창 시절 배웠던  북해는 빙하퇴적물 뱅크의 발달로 훌륭한 어장이고 블랜트석유의  산지로 그 가치는 뛰어나다지만

 해안의 경관만큼은 우리의 동해보다  훨씬 단조롭고 재미없어 보였다. 하얀 모래 백사장도 없었고 가까이에 푸른 산과 뾰족한 산봉우리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으며  끼륵끼륵 갈매기들만  스산하게 날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의 쓸쓸한 기분의  더 큰 이유는 나 자신이 외로은 이방인 처지 때문였을지도 모른다.


시선을 황량한 초원의 언덕으로 돌리니  스코틀랜드의 비장한 저항의 역사가  떠올랐고

몇년후에 개봉된 브래이브하트의 주인공 절규도 이곳의 옛 저항의 모습이었다.  또한 오랜기간  상대적으로 강했던 잉글랜드에 의해 핍박받아온 이곳의 옛 왕국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날밤 늦은시각 다시 런던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올라야 했다.

 새벽쯤에 이르러 불편한 선잠에서

깨어보니 런던의 아침이었다.


오늘은 프랑스 입국을 위해 도버항에 가는 날이다. 런던 중앙역에서

조금은 오래된 도버행 로컬열차를 타고 한시 간이상 달린 후 도버역에  도착한 것 같다. .

도버는 우리의 서울과 인천 같은 위치에 있지만 그위상은 인천과 전혀 다른 작은 소도시였다.

아마도 서울과 달리 런던은 배가 직접 들어오는 항구도시 때문일게다.


도버역에서 하얀색 석회암 절벽아래의 인도를 십여분 걸어서 도버 국제여객선터미널에 이르렀다.

칼레행 카페리호는 두 가지의 선사가 있었다.

즉 유로파라인과 스텐자 라인이었는데 나는 유로파라인 페리티켓을 구입하고 잠시 후 승선했다.

약 5천 톤 급가량의 대형카페리호는 도버항의 인상적인 하얀색절벽을 뒤로하고 프랑스 칼레항으로  출항했다.

나는 카페리호 후미의 가장상층갑판 위 난간에 기대서서 점점 아득히 멀어지는 영국땅 도버의 인상적인 하얀 절벽을 계속 응시하였다. 선상갑판 위에 수십 명이  올라와 있었지만 동양인은 오르지 나 혼자였다.


 옆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백인여성에게 정중히 부탁하여 하얀 절벽 도버항을 배경으로 나의 독사진을 며칠 만에 찍을 수 있었다.

크누님한테서 빌려온 니콘 카메라를

외국에서 타인에게 맡겨 사진 찍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기자의 말대로 중동에서 사진 찍기를 부탁했더니 카메라를 들고 군중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더란다. 그 당시는 카메라가 여행의 필수품 영순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맑고 푸른 하늘과 잔잔한  도버해협의 푸른 바다를 한 시간도 채 감상하기 전에 페리호는 칼레항에 다다랐다. 이때 처음 영불해협이 이렇게 좁다는 것을 알고는 이 좁은 바다로 인하여 존재했던 역사적 특이점들이 머릿속을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그런 와중에 칼레항에 도착했다.

이제는 프랑스 땅이다.

사람들의 모습도 라틴계여서 그런지 영국과는 많이 다르고 조금은 동양인답고 활기 있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표시가 불어 일색이고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우 만국공통어(바디랭귀지)를 구사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칼레역에  도착했다.

저녁까지는 파리로 들어가기 위해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대륙 철도의 시작 칼레역창구에서  최초로 두 달짜리 유래일패스에 시작일 스탬프를 받았다. 그리고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중 안내방송의 리듬감 있는 불어의 동그란 발음들이 귀를 낯설게 했다.  또한 플렛폼에서 모자간 이별의 제스처인지 양쪽으로 네 번이나 볼을 비비는 인사법은 새롭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곧이어 파리행 로컬열차에 올랐고 열차 안에서 처음으로 티켓검열과 여권사증스탬프를 받은 후 차창밖을 내다보니 끝없는 푸른 평원지대였다.

중간정착역 아미앵을 지난 후 세 시간쯤 후에  그 유명한 도시 파리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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