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청보리 밭

그리고 보리의 추억

4월 이맘때가 되면 아랫녘 고창에서는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이곳은 요즘 곡식을 위한 보리농사 보다는 이처럼 푸르른 청보리밭을 감상하며, 느끼고, 즐기게 만드는 경관농업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어느덧 남도들녘 청보리밭은 우리들의 유년기 푸른 추억을 반추하는 낭만기행의 명소가 된 지 오래이다.

따스한 봄날에 만경평야를 내달려 청보리 초록빛 바다에 흠뻑 빠져들어 본다.

시원스레 펼쳐진 청보리밭,

바라만 보아도 싱그럽다.

청량하게 다가오는 온통 푸른 기운에 일순간 안구정화 된 느낌이다.

지평선에  다 일듯 초록물결이 일렁이고  

미풍에 녹색파동인양

사라락 마찰음 흩뿌리며

끝없이 퍼져간다.


여기 초록빛 바다는 삭막한 요즘의 도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힐링의 장소임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청보리 푸른 물결이 썰물에 갈라진 듯

여러 갈래 나있는 곡선의 오솔길을 이리저리 걸어본다.

저만치 아늑한 곳에 덩그러니 놓인

포토존 빈 밴치에  나 홀로 걸터앉아 초록의 지평선에  시선을 놓는다. 무념무상, 풀멍에 빠져든다.


대지가 뿜어내는 풋내음, 속삭이는 종달새, 바람결 소리, 오감을 자극하는 자연의 숨소리를 하염없이 듣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소풍 나온 노란 병아리색 아이들 재잘재잘거림이 고즈넉함을 깨운다.


이제야  청보리 밭 원초의 모습이

하나,둘  내 눈앞에 성큼 다가선다. 밭고랑에 흩뿌려 자라난 보리순들 빽빽하게 키를 잰다.

억샌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평행선 잎맥이 진한풀색으로 각각이 나풀거린다. 벌써 한두개씩 이삭이 패여  낱알모양이 총총히 그려진다.

 

보리는 요즘들어 다시금 각광 받는 곡식중에 하나가 되었다. 영양성분이 다양하여 현대인의 식단에서는 흰 쌀 보다도 건강에 유리하단다.

우리의 보리는 대개 동절기에 재배된다. 따라서 극성스런 병충해나 잡초피해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무농약 무공해 먹거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또한 동절기에는 저온극복을 위한 식물체내에 양분축적이 뛰어나다. 이는 역설적으로 추운겨울이 가져다 준 자연의 선물임에 틀림없다.


물론 동절기 곡물로는 슈퍼푸드 기장도 있고 우리밀도 있다. 하지만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고 가난한  옛시절을 함께했던 보릿고개 추억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봄날 청보리에 더욱 관심이 가는것 같다.

또한 보리품종은 다른 어떤 곡물보다도 세계각처에 널리 퍼져있다. 척박한 극한의 기후에도 생육이 가능한 곡물이기 때문이다.  티벳고원이나 북극권 백야의 지역에서도 재배할 수 있단다.

그래서 세계통용 명칭도 "보리(Barley)"인것 같다.

요즘은 보리쌀이 쌀보다 더 대접받는 시대가 됐다.

예전 보릿고개 시절등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긴 하다 . 하지만 요즘에는 시장의 수요 공급 문제이다.

우리보리 생산량이 턱없이 적은 이유일게다.

'보릿고개'란 무엇인가? 유행가 가사에서도 나온다. "아무리 넘기힘든 고개라도 보릿고개 만큼 높겠는가" 라고 한 것을 보면 참 힘든 고개였나 보다 .

사실  나 자신은 보릿고개 세대는 아니다.  또한 이맘때 떠나는 남도 청보리밭축제 낭만기행의  정서와도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옛시절 청보리 그리고 보릿고개는 우리서민들의 삶과 결코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였다. 따라서 그 얘기를 조금은 소환해야 보리의 추억에 채면이 설것 같다.


좀더 오래전 세대들은 청보리밭,밀밭에 대한 추억으로 선남선녀들의 낭만적 밀회장소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또는 남도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라면 초봄에 돋아나는 푸르고 연한 보리싹을 보면서 추억속의  음식으로 구수한 보리순 장국이 생각난다고도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보리에 대한 추억이라면 초등이전에 보리순을 잘라 보리피리불던 때와 동네형들을 따라가 청보리 이삭을 건초불에 구워먹던 때의 희미한 기억이 있다.


보리가 익어갈 때 쯤 풋보리이삭을 한줌씩 꺾어다가 산모퉁이에 약한불을 피우고 구워 놓는다. 그리고 구워진 시커먼 풋보리를 두손으로 비벼서 검댕이를 후후불어 날렸다. 그렇게 검댕이를 자연스레 입가에 묻히며 낱알을 먹었다.


가을쯤에는 서리태 풋콩도 꺾어다가 구워먹기도 했다. 보리낱알 보다는 풋콩이 더 맛이 좋았지만 모두가 하나의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또다른 추억하나를 굳이 추가하자면 초등시절 보리밥 도시락이 인기였던 혼분식 장려시기가 있었다.

한번은 도시락 위쪽만 꽁보리밥을 언저놓아 학교에서 칭찬받았던 해프닝도 기억난다.


보릿고개 세대는 같은나이 또래라도 출신지역이나 가정환경에 따라 그기간과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과 시골의 보릿고개가 다르고 농촌과 어촌 그리고 산촌의 그것이 달랐다.

서해안 갯마을 아이들은 보릿고개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바닷가 갯벌은 항상 아이들의 먹거리 창고였기 때문이다.

보릿고개는 대략 몇월부터 시작 됐을까. 아마도 `춘삼월 해길다 꾀꼬리 울면`하던때인 삼월부터 시작해 보리가 익어 먹을 수 있는 유월중순 전까지일게다.

소작을 겨우면한 빈농이 대부분인 우리네 농촌에서 재래종 쌀의 소출은 변변치 못했다.

그소출로 가을부터 겨우 3~4개월 양식을 충당 할 정도였으니 아마도 보리 수확철을 학수고대 했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상황은 지역 부호들의 고리임대 장려쌀이 성행 했다하니 이래 저래 보릿고개는

힘겨웠던 시기였슴이 분명하다.

​성공한 어느 허브랜드 사장은 보릿고개시절  장려쌀이라는 고리대금에 시달린 경험을 떠올리며 씁슬해 했다.


그는 많은 형제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단다.  20대중반에 선친의 유산으로 부채만 떠안은 것이다.

즉 서른가마 장려쌀 부채를 물려받고

암담해 했었다고 한다.

장려쌀은 봄에 쌀을 한섬 빌려가면

가을에 햅쌀 두섬을 갚아야 하는

고리임대 쌀이라고 한다.


그 허브랜드 사장은 어릴때 부친과 함께 가을마다 농사지은 햅쌀을 수래에 싣고 매년  빚을 갚으러 가야만 했다고 한다.

또한 그 일이 매년 반복되는 악순환이 그렇게도 서글펐다고 회상했다.

그후로 보릿고개는 쌀의 다수확 품종

보급과 경제발전으로 해결 되었다. 하지만 청보리밭을 볼때마다 누런 보리로 바뀌길 고대하던 예전 가난한 농부들이 생각난다.

또한  봄철에 이렇게 청보리밭에 서있으니 현재의 신선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와 그시절 농민의 애처로운 마음이 오버랩되어  조금은 들뜬 기분이 숙연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20대 시절의 천방지축 유럽여행기(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