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불놀이
ㅡ여럿이 줄지어 서서 쥐불통을 힘차게 돌리면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불덩이들이 커다란 동심원을 그릴 때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끼고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또한 다음날이 밝아오면 쥐불놀이 땔감을 충분히 마련하는 것이 대보름 무렵 우리들의 주요 일과였다. ㅡ
세월의 빠름을 잊고 싶었던 탓인지 연달아 스쳐가는 달력의 숫자에는 무관심으로 지내왔다. 그 와중에 시장과 마트에 땅콩, 호두 등이 진열된 것을 보아하니 대보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낀다.
요즘은 대형마트의 진열상품만 얼핏 살펴봐도 특정한 날들이 다가왔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명절 무렵의 선물꾸러미 진열부터 연말의 X-마스 그리고 발랜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등 점점 종류도 다양해진다. 그 행사기간도 이번 대보름의 부럼들 출시처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X-마스의 경우 한 달여 전부터 각종 등 장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상업주의 편승은 분명히 명절 등 본연의 의미와 다르게 식상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반세기 전 우리의 유년시절, 시골의 대보름 무렵, 그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물론 도농 간의 지역에 따라 또는 남녀 간의 연배에 따라 여건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우리 세대의 그때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봄철부터 명절이나 대보름을 위한 먹거리 준비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대부분의 먹거리가 자급자족이던 시절에 집에서 가꾸거나 또는 필요한 나물재료들을 산야에서 손수 구하여 정성껏 말리고 저장했다.
우리 집의 울타리 주변에는 커다란 참죽나무가 많았다. 물론 그 시절엔 나무이름도 토속적이게 까중나무 또는 쭉나무라고 불렀다. 봄이 무르익는 4월 말쯤이 되면 온전히 하루를 날 잡아 햇순을 따내곤 했다.
붉으죽죽한 참죽순을 긴 장대 갈고리 낫으로 잘라 내렸다. 하루종일 이렇게 따 내린 참죽순은 소여물 끓이던 가마솥에서 데쳐내었다. 그리고 멍석에 펼쳐 널어 몇 날며칠을 잘 말려야 했다. 며칠 후 잘 건조된 참죽 묵나물을 몇 광주리씩 보관해 두었다. 대부분은 대보름 무렵에 먹기 시작했고 그때쯤 장날에 잉여분을 내다 팔기까지 하였다.
그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명절대목의 시골 오일장은 성시를 맞아 인산인해를 이뤘다.
정월 대보름의 먹거리는 특별했다. 액운을 쫓는다는 부럼 견과류와 오곡밥 그리고 다양한 대보름의 나물류들이다.
겉이 단단한 부럼재료는 호두, 밤, 땅콩이 주를 이뤘고 간간이 잣과 은행도 사용되었다.
우리 집의 경우, 대보름 하루 전날은 좀 더 특별한 날이었다. 조부님의 기일과 겹쳤던 관계로 먹거리가 더욱 풍성했다. 각종 나물재료가 준비되었고 떡, 다과가 마련됨은 물론이다. 고사리, 참죽나물, 취나물, 호박고지, 피마자잎 등 여름내 채취하여 잘 건조해 보관해 둔 각종 묵나물 종류만도 예닐곱 가지가 넘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런 수고로운 마련들은 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대보름이 다가오면 각종 놀이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나의 초등 저학년 때까지의 대보름 무렵, 시골풍경을 돌이켜 본다면 끝없는 추억이야기의 화수분이 될 듯하다.
그 시절 시골에서 겨울철은 농한기였다. 따라서 설 무렵부터 대보름날까지 어른들마저도 동네잔치와 각종 전통놀이, 세시풍속 행사 등으로 여분의 시간을 바쁘게 들 보냈다.
우리 같은 아이들은 동네형들과 함께 대보름날 달포 전부터 매일밤 벌어지는 쥐불놀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어렵사리 적당히 큰 깡통을 구해와 촘촘히 바람구멍을 뚫고 철사줄로 길게 손잡이를 매어 쥐불통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녁마다 어둠이 깔릴 때면 마을어귀 들판으로 향했다. 화재의 안전지대인 그곳에서 쥐불통 안에 미리준비한 소나무 관솔을 잔뜩 쟁여 넣고 불을 지펴 빙빙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였다.
여럿이 줄지어 쥐불통을 힘차게 돌리면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불덩이들이 커다란 동심원을 그릴 때면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희열을 느끼고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또한 다음날이 밝아오면 쥐불놀이 땔감을 충분히 마련하는 것이 우리들의 주요 일과가 되었다.
이를 위해 송진 가득 머금은 화력 좋은 양질의 소나무, 마른 관솔을 구해야 했다. 손도끼며 자귀를 각자 손마다 움켜쥐고 우리들은 뒷산 왕소나무 밑에서 오후 내내 나무 그루터기와 시름하곤 했다.
쥐불놀이 절정의 날인 대보름 하루전날,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비장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또한 당일 낮에는 아쉬운 하나의 행사가 기다렸다. 겨울 동안 어른들이 정성껏 만들어준 방패연을 멀리 날려 보내야 했다. 겨울 동안 신나게 창공에 날리던 방패연, 가오리연 등과 이별을 고하는 날이었다.
즉 액운을 날려 보내기 위해 연을 하늘높이 올려, 줄을 끊고, 멀리 날려 보내어 나무 위에 걸치게 만드는 액막이 행사를 해야만 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려앉으면 이웃동네와 기세를 겨루는 쥐불싸움도 벌어졌다. 우리는 동네형들의 비장한 쥐불싸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쥐불깡통 돌리기를 끝내고 대신에 논두렁, 밭두렁의 덤불을 태우는 불장난에 열중하다가 이내 지쳐서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밖에서 맘껏 놀다가 집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긴 겨울밤의 초저녁이란 것에 실망감을 느꼈다. 왜냐면 심야의 조부님 제사까지는 한동안 잠을 쫓으며 기다림의 지난한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 이곳저곳에는 등불이 휘황하고 대문밖에는 해걸이를 자주 하던 살구나무와 감나무에 부친과 형님 간의 모종의 의식이 행해졌다. 즉 형님이 도끼로 과일나무에 상처를 내려하고 부친께서는 말리는 흉내를 하는 의식이 흥미롭게 행해졌다.
해걸이 나무에 이렇게 상처를 내 자극을 주면 종번식을 우선하기 위해 열매와 종자를 많이 맺는 생리적 원리가 있단다. 그렇지만 전래 세시풍속 중에서 이런 지혜가 숨어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심야시간이 될수록 동네 앞 들판 이곳저곳에는 작은 등불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차가운 하얀 달빛 아래 토속신앙의 간절한 지성을 드리는 촛불과 소지불꽃 들이었다.
지성드리는 장소도 다양했다. 산모퉁이 서낭당은 물론이고 마을어귀, 돌다리 입구, 시냇가 근처, 들판 한가운데 그리고 뒷산 큰 바위와 장송 나무아래 등 다양한 곳에서 무속행위가 이뤄졌다.
대부분 밤에 조용하게 이루어지던 민간신앙으로 우리 이웃 어르신 여인네들이 주로 행했던 가족들의 기복을 위한 것이었다.
대보름날 당일 아침에는 호두나 땅콩 등 부럼을 깨 먹고 귀 밝기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낮동안 어른들의 동네잔치가 열렸으며 윷놀이 즉 척사대회는 필수였던 것 같다. 오후 늦게까지 집집마다 순회하는 풍물놀이패는 집안의 조왕신을 달래주고 모두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우리들은 저녁에 오곡밥과 먹거리를 모으러 동네 이집저집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모은 오곡밥을 함께 먹으며 친구들과 모여 왁자지껄 즐거운 대보름날 밤을 지새웠다.
그 시절 이후로 세상은 급속히 변해갔다. 정겹던 고향땅의 주인공들, 선남선녀들이 도회지로 다들 떠나고 시골은 인적이 드물어졌다.
요즘 세상은 참으로 모든 것이 변화무쌍하게 바뀌어 간다.
어릴 적 대보름날, 우리에게 정겹기만 했던 전통놀이와 세시풍속들은 이제는 박제된 무대공연으로나 재현될 법한 메타인지의 세대를 살고 있다.
이제는 둥근 대보름달을 바라보며 옛적의 추억을 되살리고
회한에 잠겨봄으로 마음을 달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