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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 방문기

 ᆢ내방객의 품격에 따라 기거를 달리해 줄 열화당, 중사랑, 줄행랑등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이것은 그 집안이  손님들을 위한 배려를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ᆢ


백두대간의  준령, 대관령 옛길의 정상에 서노라면  먼저  푸르른 동해가 성큼 눈에 들어온다.  산록아래 아득한 발치에는 강릉시내와 경포호가 펼쳐 저 있어  천천히 시선을  모으게 한다.


 옛적부터  남녀노소들이 수없이 오갔을  이 높고 험한 고갯길은  민초들의 고된 여정 또한 생각나게 만든다.


 그중에서 삼백 년 전 두 자녀를 데리고 친정 강릉으로

되돌아오던  사연 많은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고갯마루에 다 달아 힘겹게 멈춰 섰을 때의  심경이 조금은 짐작이 될 듯도 하다.

물론 그보다 앞선 세대를 살았던 신사임당도 같은 이 고갯길을 넘어갔다. 하지만 평온한 양가집 부녀의 출행과 대비되어 깊은 여운만을 남긴다.


 그녀는 강릉에 정착하게 되고  당차게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 후 경지와 염전을 경영하여 부를 쌓는다.   그 아들은 경포호 주변에 저택으로 배다리집이란 의미의 선교장을 짓는다.


 그 후 후세들이 몇 번의 증축을 거치므로 관동의 대갓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근 고을과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일관된 선행을 베풀며 후세에 이른다.


통상적으로 명문권세가집이 대부분 그렇듯이 삼백 년 이상 가세가 유지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인 즉 부와 명성 그리고  권력이란 것이 사람의 마음을 미혹케 하여 교만에 빠뜨리는 속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권력의 정변에 휘말리는 취약함과   사회 혼란기의  사나운 민심에 대부분 일가가 풍비박산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잘 알려진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곳 선교장의 가풍도 삼 백 년간이나  좋은 평판을 이어 왔다.


인근지역은 물론이고 한양의 사대부들에게 까지 후한 인심이 알려질 정도였다.

선교장의 가옥구조를 보면

찾아오는 가객을 맞이하기 위한 사랑채와 행랑채등이

특별하게 많이 눈에 띈다.

전국에서 가장 큰 민가주택이면서도 다른 사대부들 집과는 다른 특징들이 있다.

다소 자유분방한 가옥구조와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긴 행랑채가 있다.  


또한 방형의 인공연못에 널따란 정자가 있다.  제철을 만나면 연꽃향과 정자에 좌정한 선객의 묵향이 어우러지는 멋스러움이 연출된다.


남녀의 생활공간을 나누고 있지만 안채에서도 밖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내방객의 품격에 따라 기거를 달리해줄 열화당, 중사랑, 줄행랑등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이것은 그 집안이  손님들을 위한 배려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 옛날 만석구니 집안으로써 수많은 식객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쉽게 짐작이 간다.


 이곳은 금강산등 관동팔경 기행의 거점이었다. 당연히 여행하는 사대부들이

숙박등을 위해 무수히 드나들었다. 또한 숙식의 후대와 친절의 답례품으로 시, 서, 화들을 넘치게 남기고  떠났을 것이다.


이곳의 숙박과 취식에는 사대부와  시인묵객뿐만이 아니었다.  걸인, 행인등 무료취식 무전여행객들도 북적였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보통 답례로 노력을 제공하게  된다. 즉 농사일을 거들거나 가사노동을 당분간 돕고 떠났을 것이 분명하다.


선교장은 이렇게 찾아오는 내방객들을 중시하였다.

이를 위해  집안규칙으로 정해놓고 대대로 일관되게  법도에 맞는 대우와 인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은 구한말 혼란기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는 전국최대규모의  민간가옥으로 현존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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