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눅눅한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장마가 오기 직전인 엊그제 까지만 해도
대기가 건조하여 메말라가던 온 땅이 이틀간 내린 장맛비에 태도가 돌변했다.
땅에 달라붙어 숨을 헐떡이던 풀들이 기지개를 켜고 비틀어진 잔디잎이 팽팽하게 생기를 되찾았다. 텃밭의 오이덩굴 호박덩굴은 한 이틀 사이에 눈에 띄게 자라났다.
이제는 지루한 장마를 걱정할 때가 됐다. 아마도 한 달 정도의 습한 우중 날씨가 계속될 것 이다. 옛말에 '삼 년 가뭄은 견뎌도 석 달 장마는 견디기 힘들다'라고 했다. 그만큼 습하고 비 오는 날의 지속은 상상외로 우리 일상의 질을 떨어뜨리고 위축시킨다.
장마의 원인은 이맘때면 나타나는 동북아의 저기압 정체전선이다. 몬순기후의 한 형태로 짧은 우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을 오르락내리락 폭우를 퍼붓고 대기를 무더운 습기로 가득 채운다. 힘겨운 일상의 시작이다.
메말랐던 도랑물이 사방에서 졸졸졸 흐르는 친근한 소리를 들으니 어린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초등이전 유년시절, 지루한 장맛비가 잠시라도 그칠라치면 어느새 대문밖에 나가 있었다.
이웃집 또래 친구와 작은 도랑물에 수수깡 물레방아를 돌리고 호박잎 줄기 대롱 호스로 작은 폭포수를 만들던 물장난이 즐거웠다. 금세 소나기라도 내리면 초가지붕 얕은 처마밑에서 옹기종기 비 피하던 그 시절이다.
매년 큰 비가 내리는 이맘때이면 농사꾼인 부친은 노심초사였다. 시냇가 닷 마지기 논둑의 보터가 큰 물에 유실될까 총총히 냇물가의 논길을 맴도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멘트 등 자재가 흔치 않던 때였다.
따라서 겨울철에는 지난여름 큰 물에 유실된 물막이 보를
개수하는 일이 농한기 연례행사였다.
부친은 몇 날며칠 냇가를 가로질러 굵은 말뚝을 여러 개 박아 놓았다. 그리고 통나무를 몇 개 걸치고 거적과 흙을 붓고 다져 넣어 작은 댐 즉 보를 만들었다.
이 모든 노력은 거의 해마다 행해지던 부친의 숙명 같았다. 농사철이 다가오면 쌀농사의 생명수인 논 물을 순조롭게 대기 위한 필수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관심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유년시절 우리는 그렇게 비 그친 틈을 타 밖으로 나돌았다. 어떤 때는 고갯마루 우리 원두막에 진을 치고 하루 종일 비를 피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점심때가 다가오면 부모님의 부름으로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집에는 따끈한 물국수나 호박잎과 하지감자를 듬뿍 넣은 수제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장마 전 재너머 밀밭에서 서둘러 수확한 밀가루로 직접 만든 분식으로 주로 비 오는 날 점심에 먹던 별식이었다.
큰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 나는 작은 양동이를 들고 형님을 따라나섰다. 재너머 들판 농수로에 가득 든 붕어, 메기, 쏘가리 등 물고기잡이를 위해서였다. 장맛비가 쏟아지고 나면 다양한 물고기가 수로 위쪽까지 많이 올라왔다.
물을 거스르는 물고기의 특성 때문이란다.
큰 물이 지나면 집 근처 도랑에 까지 송사리가 올라오고 그 당시 폭우가 내릴 때면 지붕에서 미꾸라지가 떨어졌다는 소문도 들렸다.
어쨌든 장마철은 풍부한 물의 혜택을 입는 때였다. 그 혜택의 수혜자는 물론 풀이나 나무 등 식물일 것이고 물에 서식하는 물고기일 게다..
죽순이 비 온 후 하룻밤 사이에 내 키만큼 자라고 고추밭의 잡초가 이틀 사이에 무릎 높이를 넘었다. 그리도 기세좋게 풀들이 자라나 고춧대를 훌쩍 뒤덮은 밭두렁을 모친과 함께 바라보며 , 망연자실 놀라워했던 어린 시절 장마의 추억이 떠오른다.
따라서 장마철에는 돌멩이도 자란다는 우스개 말처럼 초목의 생동이 몇 배나 빠른 시기다.
장마철 홍수가 냇가를 휩쓸고 가는 해이면 동네 앞 물가의 풍광이 딴 판으로 변했다.
우리들이 냇가에서 헤엄치고 참게 등을 잡던 진흙벽이 모래더미로 덮이고 새로운 물길이 백여 미터 밖으로 밀려나 휘감아 돌았다.
그 해에 생겨난 하얀 모래판은 수년간 우리의 여름철 놀이터가 되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은 장마철조차도 변화와 새로움을 주었던 것 같다.
이제는 비 오는 날에 그 시절 옛일을 추억하며 장마철 단상을 이렇게 적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