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Jul 15. 2021

자그로스의 박티아리 사람들

유목하는 삶을 엿보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삶의 방식


정해진 거주지 없이 옮겨 다니며 사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자꾸 길어지던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산업번역 프리랜서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라이프스타일이 주목받기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떠돌다 발리의 해변에서 프로그래밍을 하거나 글을 쓰고, 여가 시간엔 요가와 여행을 즐긴다는 그들은 비슷한 사람들과 그런 삶을 동경하는 이들을 온·오프라인에서 끊임없이 모으고 있었다. 주로 북미, 유럽 사람들이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로 가는 양상이 두드러져 보였다.


더 알게 될수록 개인적인 관심은 차차 사라졌지만,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서 '동족'을 찾아 일종의 느슨한 부족을 형성하고자 하는 디지털 노마드들의 뚜렷한 욕구는 무척 흥미로웠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디지털 노마드가 아니라, 전통적 의미 그대로 노마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수천 년간 살아오던 방식대로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양과 염소를 몰며 유목 생활을 지속하는 박티아리 사람들이다. 그들은 혼자 다니지도, 원하는 곳을 찾아다니지도 않았고, 한 부족 안에서 촘촘하게 위계화된 크고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 공동체의 문화를 엄격하게 지키며 여름과 겨울 방목지 사이를 이동하며 살고 있었다.


 자그로스로 가는 길


2017년 가을, 티루바난타푸람 공항에서 에어아라비아를 타고 샤르자를 거쳐 테헤란에 도착했다. 이맘 호메이니 공항에 올 때는 매번 이른 새벽에 착륙한다.


자다 일어나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 머리 위에 둘렀다. 저 앞쪽에 서 있던 중국 사람은 짧은 바지를 입고 나가려다 갑자기 갈아입느라 바빠 보인다. 서둘러야 한다. 비행기에서 나가자마자 우선 도착 비자부터 받고 입국 절차를 통과한 후 짐을 찾아 시내로 나갈 택시 요금만큼 환전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이란에선 마스터나 비자 같은 신용카드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여행 기간 동안 쓸 돈을 모두 유로로 준비해서 가방 속 깊숙이 넣어두었다.


첫 이란 여행에선 클래식 루트 위의 도시를 따라가며 완벽한 소우주를 구현한 듯한 페르시아 건축을 주로 봤고, 두 번째 왔을 땐 테헤란에서 한 달 머물렀다. 이번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할 때 막막하게 펼쳐지던 지평선 너머 이란의 자연을 보고 싶었다. 이란 청년들이 유목생활을 유지하던 박티아리 부족을 우연히 만난 후 시작했다는 작은 여행사를 찾았고, 그들과 함께 이란 서쪽의 자그로스 산맥에 가보기로 했다.


첫날 묵은 테헤란의 호스텔은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한국에서 예약할 때부터 빈 방이 없어서 정원에 설치한 유르트 천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하얀색 베갯잇 위에 남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만 참을 수 없어서 침구를 모두 바꿔달라고 했다. 며칠 후 자그로스 산의 흙 위에서 양들과 함께 씻지도 않고 즐겁게 노숙하게 될 줄 그땐 몰랐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모함마드와 사라가 호스텔로 찾아왔다. 가는 길에 그날 처음 일을 시작한다는 파리사를 만나 이스파한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함께 여행할 다른 사람을 만날 예정이었다. 안내하는 사람 세 명에 여행객 두 명이라는 특이한 구성이었다. 차 뒤쪽에는 등산과 캠핑 도구 외에도 가는 길에 먹을 간식과 비건인 이사를 위한 요리 재료가 가득했다.


이런 풍경이 너무나 그립다


큰 도시에서 작은 마을을 지나 멀리 갈수록, 사막처럼 보이는 풍경이 신비로웠다. 도로와 노란 들판과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기름이 떨어져 차가 갑자기 멈췄다. 모함마드가 급히 내려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기다려보자 한다. 잠시 후 기름을 실은 차가 도착했다. 기다리는 동안 막막하게 펼쳐진 풍경 속에서 바람을 맞던 시간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그날 밤은 유목 생활을 접고 정착한 박티아리 사람들이 사는 부근 마을에서 묵었다.


자그로스에서 만난 박티아리 사람들

모함마드와 사라는 되도록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고수하는 박티아리 가족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며, 험한 산길에서 휴대폰 신호가 잡힐 때마다 연락을 시도했다. 마침내 쿠치 이동 중 잠시 쉬고 있던 적당한 규모의 가족을 만났다.


막상 만나보니 아쉽게도 며칠간 이동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친척 소녀가 유목 이동 중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에 근방의 모든 박티아리 가족들이 이동을 멈춘 채 장례식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가 전해준 이야기로는 소녀가 실족한 건지 가족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 때문에 스스로 떨어진 건지 분분하다고 했다.


길을 떠날 때 배웅해주던 박티아리 가족


이미 해가 지고 있어 그날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밤을 지낸 후, 이튿날 같이 이동할 다른 가족을 다시 찾기로 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며, 닭을 잡아 케밥을 굽기 시작한다. 양과 염소만이 아니라 닭도 데리고 다니는 것 같다. 목을 잘라 피를 빼고 털을 뽑아 잘라서 꼬치에 꿰는 과정을 보고, 정성을 담아 대접해준 닭고기 케밥을 맛있게 먹었다. 비건인 이사를 위해서는 간단한 채소 요리를 내왔다.


식사를 마친 후 장작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 차이를 마시며 사라와 파리사의 도움을 받아 이란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와 옛날 옛적에 곰을 사냥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자그로스 산에서 곰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밤이 깊어도 그리 춥지 않아 텐트에 들어가지 않고 흙바닥 위에 카펫을 깔고 침낭 안에 들어갔다. 박티아리 사람들은 양모를 짜서 만든 텐트식 이동 주거에서 생활한다. 밤새 가족 중 한 사람이 총을 들고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둥근달이 조금 이지러진 채 밤하늘에서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걸 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는 난과 차이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후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규모가 다양한 유목민 가족들이 어떤 길로 이동하는지 경로를 그려둔 지도도 없고 위치를 추적할 방법도 없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을 통해 전해 듣고 찾아가 보는 수밖에. 산속 지리를 훤하게 알 때만 가능한 방법이다. 조금 더 가면 산양 떼를 몰고 이동하는 세 남매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소식에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저 앞에서 빨간색 옷을 입은 소녀가 나는 것처럼 산기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트럭을 타고 겨울 방목지로 갔고, 걷기를 좋아하는 남매만 남아 양 떼를 몰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갈 길이 바쁘지만 잠시라면 함께 가도 좋다며, 산길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을 배려해서 조금 속도를 늦춰주었다. 그래도 너무 빨랐다. 곧 점심시간이 되어 바위 그늘에 앉아 차와 난, 물에 푼 카시크kashk*를 먹고 쉬어가기로 했다.


*산양유 요구르트에 허브와 기(남아시아 요리에 쓰이는 일종의 버터)를 첨가하여 물기가 다 증발할 때까지 끓인 후 말려서 둥글게 빚은 휴대용 식량


험한 산길에서 가볍게 뛰어다니던 박티아리 남매


잠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자갈이 부스러져 미끄럽고 험한 경사로를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다닐 수 있을까.


길이 더 험해지는 곳에서 발 빠른 세 남매와 헤어져, 물이 마른 계곡을 따라 내려가 차가 기다리는 마을로 향했다. 불타는 한낮의 태양 아래 강물이 세차게 흘렀던 거대한 돌투성이 강바닥을 따라가는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사라가 산속에서 대충 말아 터번처럼 머리에 감았던 스카프를 조금 내리라고 말해줬다. 이곳 사람들은 산속에서 사는 박티아리 사람들과는 다른 모양이다. 마을 입구에 사는 가족들이 흙먼지와 땀에 절은 우리 모습을 보더니 시원한 물을 주전자에 가득 담아 내왔다.


테헤란에서 타고 온 차가 마을에 도착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출국 일정에 맞추기 위해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있는 아흐바즈로 가기로 했다. 다시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언젠가는, 이란의 북쪽 끝에서 남쪽 바다 끝까지 도로를 따라 달려보고 싶다.


한참을 가다가, 길게 늘어서서 느리게 이동하는 자동차 행렬과 검은 옷을 입고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마주쳤다. 벼랑에서 떨어진 소녀의 장례식으로 향하는 부족 사람들이었다.




박티아리 부족은 카시카이 부족과 더불어 이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목민 중 하나다. 이란어의 방언인 루리어의 박티아리 지역어를 사용한다. 박티아리 중 소수는 여름 방목지와 겨울 방목지를 오가며 여전히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번 박티아리 부족은 양 떼와 가족을 데리고 쿠치(전통적인 유목 이주) 트레킹을 하며 몇 주를 보낸다. 이런 생활방식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산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고 있다. 최근에는 쿠치가 진행되는 동안 가족과 세간을 운반하기 위해 트럭이나 트랙터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라가 쓴 박티아리 마을에서 열린 결혼식 이야기(한국어 번역)


박티아리의 쿠치를 다룬 1976년작 다큐멘터리: People of the Win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