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정해진 오늘을 아끼는 마음
새벽에 문득 잠이 깨 아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이 시간이 참 소중하구나 새삼 느껴진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한국에서도 분명 바빴지만, 그 결은 전혀 다르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예전에는 쉽게 누리지 못했던 소중함이다. 한국에서 휘몰아치던 시간들 뒤에 찾아온 고요함과 충만함, 안도감에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여유를 즐긴 시간’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버텼던 시간’에 가까웠다. 여러 역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던 나날들. 이제 돌아보니 평화와 전쟁이 공존한 가족의 일상이 그저 기적처럼 느껴진다. 결국 물리적 공간과 주변 환경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스럽다.
비행기로 12시간이 넘게 떨어진 이곳에서는 보는 것도, 신경 쓰는 것도 완전히 달라졌다. 배우자로서, 부모로서 오롯이 가족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우리의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오늘은 어떤 음식을 만들지, 다음엔 어디로 떠날지… 누군가에게는 단조롭고 지겨울 일상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어쩌면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더 아까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가진 소중함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아쉬워하게 될까.
한국에서 아이는 자주 배가 아팠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로 집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2학년 때 다시 학교로 돌아간 교실은 낯설고 험난했다. 처음 겪는 관계의 역학 속에서 정서적, 물리적 힘겨루기에 밀리는 듯 보였고, 스트레스는 그대로 아이의 몸에 나타났다. 그 무렵 나는 승진으로 무거워진 책임에 짓눌리며 두 역할 사이에서 점점 균열이 나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마련해 준 주재원 기회는 단비처럼 느껴졌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름다운 유럽의 어디든 강렬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꼭꼭 아껴두었던 육아휴직과 모든 휴직을 다 끌어당겨,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은 채 일단 멈추고 싶었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외줄타기 인생은 이미 지쳐 있었고, 혹시 무엇을 잃게 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괜찮다고 느꼈다.
허니문 기간이 끝난 지금, 이곳의 시간은 자주 낯설고 불편하다. 그래도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가끔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불현듯 찾아와 마음을 흔든다. 돈, 교육, 기회 같은 거대한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압박하지만, 결국 마음이 무너지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믿고 싶다. 이곳에서 보내는 무용하고 느릿한 시간들이, 언뜻 비효율적이고 한가해 보이는 일상들이 앞으로의 나와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심리적 자산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도 너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