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시선으로 본 영화〈자산어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하나의 다리이지, 하나의 목적이 아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너희는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20대 시절 나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았다. 참과 거짓, 이상과 현실, 형이상과 형이하. 참은 항상 더 우월하고, 이상은 더 고귀한 것이며, 형이상적인 것들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에 따라 이 모든 가치가 상대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항상 양 극단의 중간쯤에 있다. 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거짓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무모한 이상보다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더 이롭다. 형이상적인 것들은 어떤 경우 삶과는 완전히 괴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극복해 가는 과정 중에 있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로 가는 다리였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흑산도로 유배된다. 흑산도에서 약전은 관념적인 성리학을 벗어나 물고기에 관심을 두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부인 창대와 가까워진다. 창대는 서자 출신으로 성리학을 통해 출세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물이다. 그런 창대에게 약전은 물고기 지식과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창대는 약전의 가르침을 통해 과거에 합격하지만, 부패한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아전의 목을 조르게 되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간다. 가족과 함께 흑산도로 돌아가던 창대는 약전의 장례에 참석하게 되고, 약전이 자산어보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을 읽게 된다.
들뢰즈(Gilles Louis René Deleuze, 1925-1948)에 의하면 세상은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라는 흐름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았다. 영토화는 어떤 집단이나 사람이 경계와 규칙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탈영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 경계와 규칙이 무너지고 변화하는 과정이며, 재영토화는 탈영토화를 통해 무너진 규칙이 다른 방식으로 안정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Plato, B.C 428-348)은 세상 만물의 변하지 않는 이치(이데아 idea)를 상정하였고,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의 가치들에 위계질서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이데아에 더 가까우면 위계가 더 높은 것이고, 이데아에서 더 멀리 있는 가치들은 더 위계가 낮은 가치로 보았다. 나무를 예로 들자면 플라톤은 어떤 가치가 나무의 상층부, 즉 줄기와 잎에 가까울수록 더 위계가 높다고 본다면, 들뢰즈는 나무뿌리와 같이 위계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확장되는 흐름으로 세상을 보았고, 이 나무뿌리처럼 뻗어 나가는 세상의 흐름을 ‘리좀’(rhizome)이라고 부른다.
영화에서 약전은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약전의 첫 번째 영토는 성리학이었을 것이고, 그 성리학의 탈영토화는 서학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서학은 다시 재영토화를 통해 본인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학으로 인한 유배는 다시금 약전을 탈영토화로 이끌었고, 영화에서 약전은 물고기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다시 만들어가는 중이다.
반면 창대는 어부라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이데아를 꿈꾸며 성리학을 공부해 벼슬에 오르고 싶어 한다. 창대는 자신의 이데아인 성리학을 내팽개친 약전을 한심한 눈으로 본다. 창대의 관점에서 성리학은 완전한 이상이며, 약전은 그 이데아에서 멀어진 낮은 위계에 있는 인간으로 평가된다. 결국 자신이 이데아라고 믿었던 벼슬을 얻고, 잔인한 현실을 마주한 창대는 다시 흑산도로 향한다.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유는 이데아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이데아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삶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니체의 말처럼, 나 자신 또한 극복의 대상이며, 지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해야 할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치들도 여러 차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 과학자가 한 말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 마음대로 사람과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차라리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서, 흔들림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준다면, 그것보다 더 깔끔하고 편리한 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플라톤의 이데아보다는 들뢰즈의 리좀이 더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내 신념과는 상관없이 흐른다.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내 신념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는 것이 더 건강하다. 자신의 신념이 다 옳다고, 주변을 바꾸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그 사람들이 병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가 가진 신념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창대에게 지긋지긋한 물고기잡이의 터전이었던 흑산(黑山)이 자산(玆山)이 된 이유는 창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