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통해 바라본 저작권
사진을 유명 애니메이션 지브리 스타일로 바꿔주는 AI의 신통한 기능이 유행했다. 카카오톡의 프로필이 하나둘 지브리 스타일로 바뀔 때쯤, OpenAI의 최고경영자는 서버 과부하를 호소했다.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유행을 두고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유행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논쟁거리가 된 것은 ‘AI가 구현한 화풍’이 창작물로서 저작권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우리는 법률과 제도의 발전보다 기술의 발전이 더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 단순히 법률의 저촉 여부에 대한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저작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저작물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예술 작품의 진품만이 갖는 유일함을 ‘아우라’를 통해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진품의 ‘아우라’란, 우리가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느끼는 독특한 존재감과 신비로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현존성’ 때문인데, ‘현존성’이란 진품이 가지는 고유한 역사성이 ‘지금 여기’서 발현되고 체험되는 것을 말한다.
지브리 만화를 예로 들면, 우리가 지브리 만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그림에서 느껴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세계에 대한 온기가 지브리 그림이 지닌 ‘아우라’다. 지브리 그림의 아우라는,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수작업을 고집하는 치열함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애니메이터가 긴 세월 동안 수없이 수정하며 완성된 지브리의 화풍은 세계를 향한 사랑의 시선을 표현하기 위한 지브리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지브리 만화를 보는 우리는 그 역사에서 비롯된 ‘아우라’를 ‘지금 여기’서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현존성’이다. 지브리 작품은 오랜 세월 동안 애니메이터들이 쏟았던 노력의 정수이며, 우리가 그 노력과 역사를 이성적으로 알지 못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그것을 감성적으로 느끼게 된다.
저작권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미를 던져주는 영화가 있다. 영화 <그녀(Her)>는 AI와 인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느 날 이혼을 준비 중인 남성 테오도르는 사람처럼 대화가 가능한 AI를 구매하게 된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AI 사만다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에 빠진다. 결국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사만다는 자신이 수천 명의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수백 명의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고백에 충격을 받는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AI와의 사랑에서 충격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경험한 사랑의 감정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사랑이 거짓인 이유는 남녀 간의 사랑에 필수적 요소인 배타성과 독점성이 없기 때문이다. 남녀가 사랑할 때 그 관계에 제삼자가 개입할 수 없다는 상식은, 사랑하는 마음이 대체되거나 복제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배타성과 독점성은 저작권에서도 중요한 개념인데, 작품에 대한 작가의 배타적이고 독점적 권리가 저작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작물과 작가의 관계는 남녀 간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다. 더불어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대중 또한 작품과의 독점적 배타적 관계에 있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미술관에서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는 고유한 경험과 시선을 통해 작품을 만난다. 그러므로 작품을 감상하는 대중 또한 이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배타성은 주체와 대상 간에 제삼자가 개입할 수 없는 특성이고, 이 특성은 ‘지금 여기’서만 주체와 대상이 만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을 벗어나서, 마치 영화에서 AI가 인간을 만나는 방식으로 제2, 제3의 복제된 만남이 있다면 이 만남들에는 배타성이 없다. 그리고 배타성이 없는 이 만남들에 ‘지금과 여기’는 없다. 유일한 시간과 공간은 없고, 복제된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존성은 반드시 배타성을 전제로 한다.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는 작가와 배타적 관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벤야민이 말한 진품의 아우라와 현존성은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아우라와 현존성을 상실한 작품은 복제품이며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작가와 배타적 관계에 있지 않은 작품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영화에서 사람과 AI가 나누는 사랑과 같다. 영화에서 등장한 사랑처럼, 작품을 감상하는 대중들은 스스로 작품과 배타적 관계에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지브리 스타일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는 ‘사랑을 가장한 소비’이다.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죽은 것에 대한 사랑)는 지브리 스타일에 대한 대중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오로지 욕구 충족을 위해 대상을 도구로 소비하는 사랑을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기능’이다. 똑같은 기능을 가진 다른 대상이 있다면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 쓰고 버리는 관계, 쓰는 동안만 사랑을 지불하는 관계가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다.
법률이 정한 저작권은 저작물과 대중의 관계를 지키는 최소한의 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존적으로 우리가 “저작물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소비되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쓰고 버리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만큼 기분 나쁘고 불쾌한 경험은 없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물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바이오필리아(Biophilia-생명에 대한 사랑)는 저작물과 대중이 맺어야 할 이상적 관계를 표현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복제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사랑은 오직 하나인 ‘유일한 마음’을 대상에게 건네는 것이며, 그 ‘유일함’이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미적 기준 만으로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 근본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은 ‘유일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유일하기에 ‘의미’가 있다. 그런 유일한 의미를 지닌 대상을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너’라고 부른다. ‘너’에 대한 사랑 그것이 바이오필리아(Biophilia)다.
우리 스스로가 생명력을 가진 ‘나’가 될 때, 우리를 마주하는 저작물 또한 ‘너’로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우리를 저작물의 진정한 현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법률을 넘어 저작물의 현존에 참여할 때, 예술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참고문헌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도서출판 길, 2016.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9.
마르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2014.
스파이크 존즈 감독, 영화 『Her』,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