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기와 잘 살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바라본 열심과 잘함

by 공중부양

“열심히 해!”

직장 상사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A 상사가 말을 꺼내자, B 상사가 반론을 제기했다.


A 상사: 제가 다른 과 근무할 때, 모 과장님께서 제가 건강 해칠까 봐 “너무 열심히 하지 마.”하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B 상사: 나는 그거는 좀 아닌 것 같아. 직원들한테 “열심히 하지 마.”라는 말은 못 하겠어.


같이 밥을 먹던 나는 20대부터 지금도 믿고 따르는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라.”


그날 점심 식사 이후 나는 한동안 불편한 마음과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열심히 하지 마.”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직장 상사의 말이 나에게는 너무도 불편하게 들렸다.



미화된 열심 “전통, 명예, 규율, 최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웰튼 고등학교는 열심을 강요하는 공간이다. “전통, 명예, 규율, 최고”는 웰튼 고등학교의 4대 규칙이다. 전통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며, 명예는 그 전통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부끄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규율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며, 최고는 결국 웰튼 고등학교 입학의 궁극적 목적인 아이비리그 진학을 의미한다.


웰튼 고등학교는 ‘열심’이 구조화된 곳이다. 이곳에서 ‘열심’은 강요된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학생들에게 강요된다면, 학생들은 열심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교묘한 방식으로 미화되고 현양 되며, 성스럽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된 열심의 다른 이름이 “전통, 명예, 규율, 최고”이다. 열심히 한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열심은 의심의 여지없이 긍정적이다. 하지만 강요된 열심은 주체성을 거세하는 행위이다.



미화된 열심의 폭력성

영화에서 닐은 연극배우를 꿈꾸는 소년이다. 닐의 모든 가정환경이 묘사되는 것은 아니지만, 닐의 아버지는 큰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닐을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닐이 좋은 환경을 제공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닐의 아버지는 아들이 꼭 하버드 대학에 가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닐이 연극에서 주연을 따내고 성황리에 연극을 마친 날, 닐의 친구들과 키팅 선생님은 닐에게 배우로서 소질이 있다며 축하해 줬지만, 닐의 아버지는 그를 심하게 꾸짖고 유년사관학교로 강제 전학시키려 한다. 닐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전 잘했어요. 전 정말 잘했다고요.”


타인이 강요하는 열심에는 그 사람의 욕망이 담겨 있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열심을 강요하는 이에게도 거북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이라는 고상한 가치로 그 거북함을 감추려 한다. 마치 닐의 아버지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회적 성취를 자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처럼. 그래야만 열심을 강요하는 사람도, 열심을 강요받는 사람도 적당한 선에서 그 거북함을 감출 수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강요된 열심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Carpe diem, 현재를 잡아라!

키팅 선생님은 첫 번째 문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거두라. 이걸 라틴말로 표현하자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지.”


직역하면 ‘현재를 잡아라’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키팅 선생님은 모든 인간은 죽기 때문에, 인생을 독특하게 살라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독특하다는 것은 주체성을 잃지 말라는 의미이다. 키팅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은 현재이다. 학교가 요구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이다. 열심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을 의미한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시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웰튼 고등학교에서의 생존방식이다.


이와 반대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낭만을 얘기한다.


“기술은 필요하고, 쓸모가 있지. 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현재를 주체적으로 사는 것, 그것은 곧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삶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스승님의 가르침

20대 시절 나의 스승님은 굉장히 엄하고 무서운 선생님이셨다. 우리는 자주 꾸지람을 듣곤 했는데, 열심히 하겠다는 우리들의 말에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라.”


그때는 이 말씀이 너무도 차갑게 다가왔다. 그저 결과만을 평가하겠다는 스승님의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학기가 끝날 때쯤, 우리는 스승님의 방에 시험성적과 관련된 면담을 하러 불려 갔다. 불려 간 면담 자리에는 중간고사 때 제출했던 답안지와 기말고사 때 제출한 답안지 두 장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주눅이 들어 스승님의 앞에 앉은 나에게 스승님은 물었다.


“네가 볼 때, 너는 얼마나 성장한 것 같니?”


그때 스승님과 나누었던 대화들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스승님은 성장한 학생에게 모두 좋은 점수를 주셨다. 물론 스승님은 우리에게 솔선해서 당신이 가르치는 학문의 아름다움을 수업을 통해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 뒷모습을 보고 스승님과 같은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적어도 스승님에게 ‘잘한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성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시절 수업 시간은 항상 묘한 긴장이 흐르는 시간이었지만, 그때 우리를 가르치셨던 스승님과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의 나는 그 기억이 따뜻한 파스텔로 채색되어 있다.



나만의 속도와 나만의 방식으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이런 말을 했다.


“스스로 설계한 삶은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적합하다.”


상사가 말한 열심은 강요된 방식과 방향을 의미한다. 반면 스승님이 말씀하신 잘함은 방식과 방향은 설정하지 않은 성장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스승님은 우리에게 성장의 기쁨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스스로 성취하고 더 자란 나를 스스로 대견해하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나는 그 수업을 통해 지금 여기서 아직도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Carpe diem! 현재를 잡으라는 이 말은 주체적으로 살라는 외침으로 다가온다. 이 말은 찰나의 시간에도 나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외침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설계하고 그 방식대로 살아가야만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스승님은 우리에게 학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셨고, 그 방식은 누구보다도 스승님 다운 방식이었다.


나에게 ‘잘함’은 좋은 결과만을 원하는 성과 중심의 요구가 아니다. 나 다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것,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잘함’이다.


파스텔로 채색된 기억 속의 스승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Oh Captain! My 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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