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에서 떨어진 그대에게

영화 <쇼생크 탈출>과 승진제도

by 공중부양

승진에서 떨어지다

승진에서 떨어졌다. 평소 승진에 관심 없다던 쿨한 모습은 하찮은 나 자신을 감추기 위한 보호막일 뿐이었다. 가슴속에서 대상도 없는 원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신세를 한탄했다. 그날 밤 헬스장에서 열심히 땀을 흘렸다. 이어폰에서는 Coldplay의 「Viva la vid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라도 된 듯이, 찌질한 나 자신을 미화시켰다.



승진은 어쩌면 감옥일지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 1926-1984)는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을 통해 근대적 감시사회의 구조를 설명한다. 파놉티콘은 원형으로 둘러싼 감옥에 죄수들을 가두고 원의 가운데 감시탑을 배치하는 형태의 감옥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감시자들이 위치한 중앙의 감시탑은 죄수들이 감시 여부를 파악할 수 없도록 항상 어둡다는 것이다.


파놉티콘의 이러한 구조는 죄수들 스스로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달리 말하면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의 구조가 죄수들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감금한다고 볼 수 있다. 죄수들은 자신이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된다. 이 심리적 압박은 결국 죄수들이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도록 만든다. 감시자의 감시가 죄수들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파놉티콘의 구조가 그들을 교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죄수들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 주변에도 파놉티콘적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승진시스템이다. 한 사람의 성과를 평가하고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일련의 시스템은 파놉티콘의 불 꺼진 감시탑처럼 작동한다. 많은 직장인은 승진시스템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교정하고 정신을 감금한다.


가석방 심사와 승진제도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은 감옥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에서 레드는 강도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 중인 죄수다. 레드는 복역 20년과 30년이 되던 해에 가석방심사를 받는다. 여기서 레드는 가석방 심사관들에게 자신이 완전히 교화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번의 가석방심사에서 레드는 가석방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복역 40년 차에 레드는 세 번째 가석방심사를 받는다. 여기서 레드는 심사관들에게 말한다.


“교화? 내겐 그건 그저 꾸며낸 말이야.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말이지. 자네는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그만 뺏어, 난 상관 안 해.”


시청자 대부분은 이 장면을 볼 때 레드가 당연히 가석방 부적격 판정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레드는 이 가석방심사를 통해 그토록 고대하던 가석방 승인 판정을 받는다.


쇼생크 탈출을 볼 때마다, 레드가 더 무례하고 성의 없어 보이는 세 번째 가석방심사로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은 매번 나를 불편하게 했다. 레드의 모범적이고 성실한 모습이 가석방 부적격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승진에 떨어지고 나서야 이 장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승진제도와 가석방제도는 묘하게 닮은 점이 많다. 만약 감옥에 가석방제도가 없다면, 죄수들은 스스로 교화되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마치 직장에서 승진제도가 없다면, 직장인들이 열심히 일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두 가지 제도는 존재만으로 인간의 행동을 교정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셸푸코의 관점에서 본다면 승진제도와 가석방제도는 파놉티콘의 불 꺼진 감시탑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제도를 넘어서, 진정한 자유로

그렇다면 세 번째 가석방 심사는 어떤 의미일까? 레드는 세 번째 가석방 심사에서 “교화? 내겐 그건 그저 꾸며낸 말이야.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말이지.”라고 말한다. 이 대사에서 레드는 교화를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교화의 사전적 정의는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다. 교화는 본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을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교화는 인간을 길들이는 도구이다. 죄수들은 교화라는 명목 아래 스스로를 교정하고 억압하고 감금하도록 작동된다. 권력가들은 레드가 실제로 선하게 변화되었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가석방제도를 통해 수십 년간 레드를 효과적으로 통제해 왔다. 레드는 두 번의 가석방심사를 경험하면서, 불 꺼진 감시탑에 의해 스스로를 감금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세 번째 가석방 심사에서 레드는 가석방제도의 거짓을 폭로한다. 레드는 말한다. “자네는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그만 뺏어, 난 상관 안 해.” 적격과 부적격은 가석방제도가 레드를 규정하는 표현이다. 레드는 이제 가석방제도가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레드는 가석방제도가 파놉티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 깨달음을 통해 감옥 안에서 이미 자유를 얻었다. 가석방제도가 레드에게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레드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유를 쟁취했다. 감옥이 레드를 가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감옥이라는 제도에 길들여진 자신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승진을 넘어, 성장으로

나는 문득 생각해보았다. 지금 내가 승진에 떨어져서 느끼는 감정이 나의 주체적 감정이 맞을까? 승진제도는 승진에 떨어진 사람에게 슬픔과 패배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주체적이라기보다 구조가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들처럼, 승진제도가 억지로 쥐여준 감정을 붙들고 다음번에는 꼭 승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마치 레드가 앞선 두 번의 가석방심사에서 자신이 충분히 교화되었다고 모범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무엇인지 모를 기쁨과 희열이 몰려왔다. 나는 이 시스템이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레드가 세 번째 가석방심사에서 말한 것처럼 “당신네가 말하는 승진? 그건 다 헛소리야.”하고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정의하는 승진”을 추구하겠다. “절대로 너희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주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정신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사회 부적응자의 자기 위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여기서 자유와 기쁨을 느낀다. 승진에서 떨어진 다음 날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성장이다. 이제 이 글을 승진에 떨어진 그대에게 보낸다. 내가 느끼는 자유와 기쁨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이길 기대한다.


“자네는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그만 뺏어, 난 상관 안 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