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부 西風賦

서풍에 대한 노래이다.

by 최서희


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꺼냈다 다시 꽂았다를 반복하다
문득 펼쳐진 89쪽,
서풍부(西風賦).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잠깐 본 것 같은데
책을 덮고 보니
30분이 지나 있었다.

서풍부.
복사꽃.
어쩌면 이야기인 듯.

한 시도 쉴 틈 없이
내 일상을 온통 차지해 버린 시.
며칠을 시달리다
결국 다시 서점으로 간다.

89쪽,
얇은 시집을 꺼내 들고
그제야 숨을 고른다.

복사꽃을 울려놓고는
가버렸나 보다.

슬픔이 슬픔인 줄 알면
조금 나을까.

새벽이면 일어나 거실을 돌고
다시 베란다 창문을 연다.
처음에는 이마만 내밀다가
고개가,
어깨가,
상반신이 창틀 너머 세상으로 기울어가는 것을
정신줄이 잡아끈다.
수개월을 반복하다
남편의 놀란 눈빛을 보고
다시 병원에 전화를 건다.

잠은 잤느냐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의사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애먼 손가락만 만지작거린다.

2주에 한 번이면 좋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4주에 한 번은 보자고
약도 꼭 먹으라고 한다.
젊은 사람치고 과묵해서 좋더니
불안한지
상담시간 10분이 다 가도록
나를 놓지 못한다.

미안한 마음에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주차안내를 빙자한 호객행위가 한창인 대형 약국들 사이를 지나
그나마 작은 약국을 찾아 들어간다.
약 한 봉지를 들고 나오다 말고
다시 약국에 들어가
영양제를 산다.

그렇지,
나에게도 한참 크고 있는 아들이 있지
엄마의 불안정을 모른 척해주는,
착한 아들이 있지.
앞치마를 두르고
보쌈고기에 얹어먹을 김장김치를 꺼내 큼직하게 썬다.
시뻘건 김치국물이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듯,
냄새마저 살아있다.

아들은 놀랄 것이다.
놀란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적인 저녁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잠시 기대라는 것을 할 것이다.

나는 자신이 없다.
어찌할 수 없다.
그저
알람이 울리면
약을 꼬박꼬박 먹는 것으로
가족에 대한 예의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애써 보인다.

공황은 새똥 같다.
나무 아래로 뚝 떨어지는
하얗고 까만 새똥.

피할 틈도 없이,
어떤 규칙도 없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새똥.

나무 아래에 주차된 차 지붕으로
불규칙하게 뚝 뚝 떨어지는 새똥처럼,
갑자기
시끄럽게
그렇게
뚝 떨어진다.


공황은 그렇게 나에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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