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勞動

몸을 움직여 일을 하다.

by 최서희


갑자기 이사를 해야겠다며
주말마다 부동산을 돌더니
최종 후보 3곳을 들고 와 함께 가보자고 한다.

내 눈엔 지금 사는 곳과 다를 바 없다.
거기서 거기 같은 집인데, 굳이 왜?

마지막 집을 보고 돌아오다 문득,
아...
고만고만한 거리, 비슷비슷한 구조인데,
그런데,
주말마다 발품 팔아 고르고 고른 집들이 하나같이 죄다 1층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불안한 눈빛을 지나
결국 이 사람의 손과 발을 잡아끌었나 보다.

미안한 마음 반,
부끄러워 화가 나는 마음 반.
이왕 1층으로 이사 갈 거라면
텃밭이 있는 집이 낫다며 마지막 집을 택하고,
곧바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다.

남편이 슬며시 들어와
내 발의 양말을 벗기고 발 마사지를 한다.

“더 좋은 집이 아니라서 화났어?”
“상의 없이 이사하자고 해서 삐진 거야?”

알면서 모른 척,
다른 이유를 갖다 대며
가해자를 자처하는 남편이
못내 아쉽고 안쓰럽다.

텃밭에는 상추랑 쑥갓, 깻잎을 심을 거야.
작은 벽돌이 필요해.
여기부터 저기까지는 내 구역이라고,
그러니 들어오지 말라고.
담을 세우고 문도 만들어 걸어 잠글 거야.

번갯불에 콩 볶듯 이사를 하고
밤을 새워 집 정리를 한 건
빨리 나가고 싶어서였다.
거실 창문을 열면
곧장 정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산책로와 이어지는 곳이라
나무가 울창한 건 좋았지만
텃밭에는 해가 쨍하게 들어오지 못했다.

하루는 방치해 둔 풀을 뽑고,
다음 날은 남편이 사다 준 빨간 벽돌로
작지만 견고한 담을 쌓고,
그다음엔 흙과 거름을 뿌리고 물을 흠뻑 주었다.
또 다음 날엔
장화를 신고 흙을 고르게 다진 후
장화를 신은 채로 모종을 사러 농업사로 향했다.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농업사와 어울리지 않는 욕심이라 그런 것인지
가게 아주머니는
“이만큼만 가져가고, 부족하면 또 와~”
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아주머니의 거친 손등과 웃음에 묻어나는 주름까지도 기분 좋은 날이었다.

양손 가득 들린 모종을
텃밭 앞에 내려놓고 보니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몇 년은 산 듯 익숙해진 새집이다.

두 뼘 간격으로
앞줄엔 상추,
그 뒤엔 쑥갓,
깻잎은 제일 뒤에.
신학기 교실에서 키순대로 자리 배치를 하듯이
키 큰 놈은 뒤에,
작은 놈은 앞자리에 옹기종기 심는다.

텃밭의 쓰레기며 농기구 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와
팔짱을 끼고
갓 심은 풀들을 바라본다.

무성하던 풀은 죄다 뽑아버리고
여린 풀들만 줄 세워 놓은 꼴이
우습다가도,
보다 보면 괜히 좋다.
그냥, 좋다.

아무 때나 문을 열고 살 순 없어도
문이 열려 있다고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새벽이면 화들짝 놀라 깨는 일도
황급히 문을 열고 나를 찾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남편에게 그럴듯한 선물을 한 기분이다.
바보 같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텃밭을 자랑한다.

“관상용이야.
뜯어먹으려는 게 아니고
그냥 보려고 키우는 거야.”

벌레가 생기면
하루 종일 나무젓가락을 들고 쪼그려 앉아 집어내고,
색이 바랜 잎은 조심히 떼어낸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면
다 뽑고
다시 아주머니에게 가서
이번에는 욕심 가득 풀들을 사 올 것이다.

그럴 셈으로 텃밭을 만들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뿌리개로 물을 주니
흙이 튀고
잎이 땅에 닿아 미워졌다.
조리개의 주둥이를 떼어내고
모종의 잎 하나하나를 손으로 들어
뿌리 쪽에만 조심스레 물을 준다.

좁고 보잘것없는 텃밭이라도
작정하고 일을 하니
시간은 금방 갔다.
오전에는 흙 위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팔짱을 끼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고
아침이 왔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중고서점에 들러 팝업북을 샀다.
또 다른 날은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어떤 날은
그저 침대에서 하루를 보냈다.

신기하게도
제자리에 선 것만 같던 풀들은
매일매일 자기 속도로 자라났다.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해지고
남편의 퇴근이 밝아지고
함께 먹는 저녁 식사가 잦아지면서
텃밭은 점점 열과 행이 흩어져 무질서해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 건강해지고 있는 거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2주에 한 번이
4주에 한 번이면 된다고
약의 용량도 줄이자고
의사 선생님은 무심한 듯 웃었다.

노동은 그랬다.
마음과 생각이 자기 멋대로
하루와 삶을 지배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게 하더니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어둠 밖으로 밀어냈다.

그 어둠이
동굴이 아니라
어쩌면 터널의 한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공황도 나아질 수 있다는,
평생 이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그런 아기처럼 가벼운
대책 없이 해맑은
내일을
꿈꾸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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