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지
늦여름쯤 일이다.
휴일동안 내려간 시골에서 몇 가지 식물들을 모시듯 데리고 올라왔다.
평일 저녁 학원 수업이 있어 시간에 맞춰 일찍 서둘렀다.
도착하자마자 수레에 모아 묶어둔 식물들을 분리시키고 죽지 않을 만큼 적당량의 물만 뿌려둔 채
집 근처 생활용품점에서 20kg짜리 배양토를 사다 나르고선 서둘러 학원으로 달려갔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식물마다 어느 화분에 담을지를 눈대중으로 계산해 보며 모자란 화분을 대신할 것들을 찾다가
선뜻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플라스틱 통들을 죄다 꺼내어 바닥에 물구멍 뚫는 작업을 했다.
다음날
인터넷으로 미리 주문해 둔 돌멩이들이 도착했다.
물 빠짐에 좋다 하여 마사토 중립, 대립을 20kg짜리로 두 종류나 사재 낀 탓에
현관은 포대자루로 가득 찼다.
전날 저녁 작업해 둔 화분과 구멍 뚫린 플라스틱통에
1차로 마사토를 깔았다.
그 위에 배양토와 마사토를 섞어 다시 깔고선 식물을 하나씩 심었다.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데
하필 도서관 봉사날이라 진행하던 작업물은 그대로 벌려두고 뛰어나갔다.
평소보다 일찍 도서관에서 돌아와 팽개치듯 버리고 간 작업들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학원 출발 전에 끝내긴 역부족이었다.
곧 다시 나갈 시간이 되었고, 집은 엉망탕으로 해둔 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집이 비어있는 동안 환기라도 시켜야겠다 싶어 앞뒤 베란다 창문은 최대한 열어두고 학원을 나섰다.
창문을 열어둔 게 사단이었다.
사건당일 저녁.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나머지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물을 트는 순간 어마어마하게 큰 바퀴벌레가 세면대 한 귀퉁이에서 훅 튀어나와 도망치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화장실 안에서 정지상태로 한참을 대치했다.
이놈을 어찌해야 하나
죽일 마음은 없는데,
그렇다고 놈을 손으로 집어 집밖으로 던질 용기도 없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데 자꾸 도망가는 놈을 붙잡기 위해 샤워기로 물을 뿌려댔다.
놈은 허우적거렸고 나는 그놈이 도망가는 방향을 향해 집중적으로 물대포를 쏴댔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놈은 물이 내려가는 배수구로 빠져버렸다.
좁은 구멍으로 빠져버린 이상 다른 방도가 없어 배수관으로 흘려보내야겠다 싶어
배수구안으로 샤워기물을 뿌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바가지로 물을 퍼 들이부었다.
한참을 퍼부은 뒤 상황을 지켜보았다.
놈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걸로 일단락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화장실문은 부서질 듯 쾅 소리가 나도록 빈틈없이 닫아두고선
급한 대로 다시 식물 심기 작업에 돌입했다.
자연의 부름으로 화장실에 직행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마주칠 그놈이 떠올라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몇 시간이 지나고 결국
두려움과 마주해야 될 때가 왔다.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괜시리 욕실화도 발로 한번 차 보면서 동태를 살폈다.
잠잠했다.
욕실 진입 전 마지막 확인사살로 화장실 구석에 세워져 있던 포스터 한쪽을 걷어찼다.
설마 했던 놈이 나타났다.
그놈이 내 방이며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닐 상상을 하니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놈을 가둬야 한다.
분리수거하려고 세워뒀던 단단한 그란데 사이즈 종이컵을 집어 들고 들어가 결연히 화장실문을 닫았다.
기. 필. 코.
여기서.
이 안에서 끝내야 한다.
놈은 바깥에서 생활한 놈인지 기골이 장대했다.
대신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느리기로 소문난 내가 쉽사리 그놈을 종이컵에 가두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벽에 붙어있는 놈 때문에
벽면에 컵을 갖다 대고 가두게 되어 손을 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젠장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 자세로 또 한참을 보냈다.
팔이 점점 아파 왔다.
어떻게든 그놈을 바닥 쪽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틈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종이컵을 조금씩 바닥 쪽으로 끌고 내려와 겨우 타일바닥에 안착시켰다.
아.. 이제 어쩌나..
처음 계획은
종이컵을 바닥에서 사정없이 흔들어 그놈의 정신을 빼놓은 뒤 바깥에 갖다 버릴 요량이었다.
계획대로 몇 번을 흔들어 봤는데
아무래도 종이컵 속의 공간이 커 제대로 흔들리지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일단락이 되었다 싶어 급한 볼일부터 보고 다시 생각해보자 싶었다.
그런데 용무를 보고 나니 더더 용기가 없어졌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이 마당에
저놈을 아파트 1층까지 들쳐메고 뛰어내려 갈 기운이 없다.
아직 식물작업은 산더미같이 있는데..
거기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미용 실기시험을 치는 친구의 부탁으로 샴푸모델을 해주기로 한 날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단 종이컵으로 감금해 두었으니
내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선 다 집어치운 채 잠을 청했다.
3일 차
늦게 잠들었는데도 잠을 설치는 바람에
또 그 와중에 배고픈 상태로 잤더니
잠든 지 2시간 만에 저혈당이 와 잠에서 깼다.
초콜릿을 깨부수어먹으며 진정을 시키고
다시 누웠지만 어차피 한 시간 후에는 일어나야 했다.
미리 맞춰둔 기본알람 1번 보조알람 3번으로 겨우겨우 눈을 떴다.
건조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사이로 인공눈물을 쑤셔 넣듯 한통을 들이붓고
널브러진 옷가지를 대충 주워 입고 지하철을 탔다.
출근시간보다는 더 이른 시간이라
다행히 지옥철을 맛보지는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도 잠은 안 깨어 가는 내내 서서 눈을 감고 졸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또 마을버스를 타고
산업인력공단에 도착했다.
별 무리 없이 모델일을 끝내고 곧장 집으로 왔다.
잠을 못 자서 기진맥진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저녁수업이 있는 날이라
학원에 가기 전 이젠 정말 식물작업을 끝내야 했다.
이 모든 걸 마치고
그놈을 내보낼 생각이었다.
식물작업을 하면서 다시 옮겨 심고 싶은 식물종류가 몇 가지 생겼지만
완벽을 추구하기엔 내 체력이 너무 따라주지 않았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고 학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그놈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업 전,
새벽에 시험장에서 만난 친구와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둘 다 수면부족상태에다가
친구는 시험이 끝나자 긴장도 풀린 모양이다.
둘 다 대화가 횡설수설.
아직 저녁수업이 남은 나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안 먹던 박카스까지 한 병 마셨다.
그럼에도 저녁 먹자마자 들었던 수업이라 그런지 노곤해져서 잠깐씩 졸기도 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피곤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얼른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놈 때문에 들어가기가 선뜻 두려워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놈이 갇혀있는 종이컵부터 확인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다.
그놈을 가둬둔 후로,
집에 오자마자 종이컵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뿐 아니라
화장실 앞을 지나갈 때마다 종이컵을 주시했다.
그놈을 치우려니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종이컵에 갇혀있으려니 생각하면
조금은 안도하며 생활했다.
오늘 안에 해결보기로 마음먹었었지만
오늘 역시 너무 피곤해서 저놈을 치울 기력이 없어도 너무 없다.
일단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거사를 치르기로 마지막 계획을 세웠다.
4일 차
원래는 오랜만에 늦잠을 자보려고 마음먹었지만, 아파트에서 하는 자체방송 때문에 잠에서 깼다.
게다가 방송내용이 아파트 각세대마다 소독을 실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잠결에 방송을 듣다가
소독..?
아 맞다
그놈이 남아있지 싶어
각성하고 깨버렸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외출용 신발을 신고
목장갑까지 끼고
종이컵을 받칠 단단한 판을 준비한 다음,
비장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심조심 딱딱한 판을 종이컵 밑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수상했다.
뭔가 느껴지는 움직임이 없었다.
도망가려고 죽은척하고 있는 중인가 싶었다.
아무렴 어때 일단은 내보내고 봐야 했다.
조심히 종이컵을 받치고 1층으로 내달렸다.
현관에 잠깐 서서 그놈을 방생시킬 위치를 잡고 목표지점으로 향했다.
자 쇼타임이다.
나는 화려하게 종이컵과 받침을 허공으로
하지만 내 몸엔 닿지 않게
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흩뿌리듯 내동댕이쳤다
종이컵은 꽉 붙잡은 채!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처리했구나 하며 안도하며 말이다.
내 계획대로라면
그놈이 공중으로 날아가 풀밭에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말이다.
내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풀밭을 살피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움직이는 무언가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잠깐동안 뇌가 정지했다가 다시 재생되었다.
그럼 그놈은 어디로 갔지?
종이컵을 들어 올리고 도망갔나?
누가 집에 들어왔나?
다음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문을 열기가 무섭다.
갑자기 온몸이 가려운 느낌이다.
하...
그놈은 창밖으로 나갔을까?
젠장
어떻게든 그날 처리했어야 하는데 나는 종이컵을 너무 믿었다.
다른 컵으로 이중잠금이라도 해놨어야 하는데...
아....
내가 가져온 식물들 사이 어디에 숨어든 건 아닌지
당분간 집에서 숙면을 취하긴 글렀다.
종이컵 위에 그 사재 낀 돌멩이들이라도 무더기로 올려놓을걸..
나는 너무 안일했고..
그놈은 영리하고 힘이 셌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부터 몸이 계속 가려운 게.
기분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