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면 내 생일이다.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스무 살이 된다.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때의 나보다 더 잘 살아내진 못했을 거라는. 그런 생각만 든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을 대죄로 간주한다. 사실 성당에 처음 방문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종교생활이라는 안전장치가 나를 세상에 조금이나마 더 붙들어놓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선행에 대한 축복을 바라고 가톨릭에 입교하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죄에 대한 처벌만을 바라고 입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내 존재마저 죄로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존재가 죄가 되면 욕구도, 행동도, 생각도 죄가 된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 바람 하나에마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면 더 무엇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불행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우스운 사실은, 불행함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보다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들도 잘 견뎌내는데, 나는 왜... 우울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대체 왜...
이 상황까지 도달하면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게 된다. 첫째는 모든 감정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큰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무감정해지듯이 기쁨과 슬픔 모두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래가지 않는다. 사람은 이성보다 감성에 휘둘리는 동물이다. 방어기제가 언제까지나 작용할 수는 없다.
둘째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불행해도 안 되고 행복해도 안 되는, 이 모든 문제의 시초.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가장 역설적이게도 존재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정말 간절한 생의 욕구는 잔뜩 얽힌 뇌의 회로를 따라 자살시도와 자해로 이어진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해진 뇌는 이를 행복과 속죄의 길로 여긴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고의 흐름이, 당사자들에게는 가장 합리적이고 자기희생적이며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이타적인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