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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Jan 04. 2025

그림자의 물음

살고 싶지 않아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끝날 라고 기대것도 아니었다. 우울은 생과 사 사이에 두터운 벽을 세웠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죽음 에 있었다. 시기의 차이일 뿐,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죽음뿐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삶을 바라보며 살아갔다. 나는 죽음을 향해 살아갔다. 생기 가득한 세상 속에 나 홀로 죽어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필연적인 공포 때문이다. 죽음을 꺼리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이 자살 시도를 계획으로, 계획을 생각으로 미루게 했다.  거기까지였다. 내 속에서 자라나는 우울과 불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생존 본능을 서서히 갉아먹어 한 사람을 희롱하는 질병이 바로 우울증이었다.


'살기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성립할 수 있는 그런 말들을 갖고 싶었다. 무심코 품은 작은 바람들은 몇 배로 부푼 좌절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주변 사람들은 내 문제의 원인을 알고 싶어 했다. 내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우울의 단서를 찾아내려 했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웃고 떠들며 활달한 모습을 보이면 다들 안도했다. 웃음으로 눈물을 대신하고 밝은 목소리로 어두운 감정을 덧씌웠다. 서서히 무너져 가는 나를 계속해서 방치했. 나라는 사람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우울증은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미치는 영향은 점점 줄어들었다. 정상적인 사고는 당연히 불가능했다.


몇 번의 폐쇄병동 입원과 1년가량의 통원 치료가 이어지며 우울을 향해 완전히 기울어 있던 시소를 조금이나마 평형 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종종 불어오는 미풍에도 크게 흔들리는 시소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이 불안정했다. 하루는 안정권에 완전히 진입했다가도 다음날이면 위험한 생각을 하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안정과 불안정 사이의 외나무다리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주 우연히 송지영 작가님의 브런치북 <널 보낼 용기>를 만나게 되었다.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본 자녀의 우울을 읽었다.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이 서서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내 곁에 엄마와 아빠, 동생이 함께 있었다는 것, 나를 걱정하는 좋은 사람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것.


우울증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스스로를 향한 자책으로 바꾸어 나갔다. 망가진 감정들은 정상적인 감정을 무너뜨리며 암세포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했다.  자신을 끝없이 비난하고 미워하기를 반복하느라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송지영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나의 밖에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작가님의 글을 처음 본 그날 댓글을 남겼다. 몇 번을 썼다 지우고, 다시 읽어 보며 망설이다 남긴 댓글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작가님께서 달아 주신 답글을 읽었다. 댓글과 답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아주 평범한 전개였다. 일상과 일상이 만나 첫인사를 나눈 것뿐이었다.


늘 그랬듯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는 깔끔한 마무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우연의 순간을 과거로 남겨 두어야 했다. 그러나 한번 글쓰기라는 탈출구를 통해 해방감을 맛본 감정들은 자유를 향해 몸부림쳤다. 그림자 속의 나를 쓰고 싶었다. 바깥을 향해 나를 읽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이 남긴 댓글 아래 조금 더 긴 댓글을 달았다.


"자살은 예방 가능하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절반쯤 틀렸다고 생각해요.
말기 암 환자에게 암은 예방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누구나 어이없어하겠죠.
자살도 마찬가지예요.
자살 징후를 발견하고 미리 막는 건 급성 우울증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 같아요.
만성 우울증은 어쩌면 발견하기 가장 어려운 암 같은 병이에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 때문인지, 조금만 신경 쓰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하지만 말기 암처럼 우울감이 깊어지면,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노력의 효과는 점점 희미해져요.
결국 환자도, 주변 사람들도 우울증의 원인을 찾으려다 자신을 탓하게 되더라고요.
작은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것, 조금 더 신경 써주지 못했던 것, 그 모든 게 마치 누구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저희 가족도 제가 병동에 입원했을 때 참 많이 자책했어요.
그런데 이것만은 확실해요.
어떤 신이 시간을 돌려준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때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모든 사람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후회도, 자책도 사실은 최선을 다했기에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예상보다 더 빠르게 작가님께서 답글을 달아 주셨다.


"맞아요. 망고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이 병은 정말 말기 암처럼 어려운 병이에요.
다른 병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 발견될수록 예후가 더 나쁘기도 하고요.
저도 우울증이 단순히 마음의 병이 아니라 악성 뇌질환에 더 가깝다고 느껴요.
그런데 ‘마음의 감기’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아요.
정신질환이라는 이름의 허들도 참 높고요.
그 누구도 그때보다 더 잘할 수 없다는 말,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그래요. 우리 딸도 그럴 거고요.
모두가 정말 애썼어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어쩌면 운명이겠지요."


답글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한번 엇갈린 마음들이 다시 만나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그 답을 찾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결론이 나오는 것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해답의 존재 여부. 내가 알고 싶은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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