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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차 마시는 시간.

차가 사람이라면 내 인생 최고의 귀인.

by 방구석도인

"보이차 마실 줄 알아?"

그가 무심히 건넨 보이차 한 편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중국에 출장 다녀온 지인이 비싸게 사온 보이차라고 했다. 스물여섯 살 때이던가, 중국에 선교를 다녀왔던 전도사님께서 보이차라고 차를 한 잔 우려 주었었는데 마셔 보고는 "걸레 썩은 맛이에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보이차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비싼 보이차라고 하니 일단은 받아놓고 보았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보이차는 비싼 보이차가 아니라 만 원짜리 저렴이었다. 중국에서 보이차 사면 눈탱이 맞는다.) 마침 누군가의 녹차 마시는 사진을 보고 다도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막상 보이차를 받고 보니 벽돌처럼 단단해서 어떻게 뜯어 마셔야 할지 난감했다.

인생의 첫 보이차. 노동지 9988.

인터넷에 보이차 마시는 법을 검색해서 필요한 도구들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자사호, 숙우, 찻잔, 거름망, 차칼, 차판. 잘 모르니 지마켓 최저가로 구매하여 차 생활을 시작했다. 35살에 다시 맛본 보이차는 걸레 썩은 맛이 아니라 묵직하니 운치 있는 맛이었다. 훗날, 보이차 동호회를 가입하고 모임에도 참석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차와 찻잔을 하나두 개 모으다 보니 그 개수가 어머어마하게 증식되었다. 더 놀라운 건 내가 가진 수량은 다른 고수들에 비하면 아주 작고 귀여운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차는 나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믹스커피나 생크림 듬뿍 들어간 카페모카 밖에 모르던 내가 밋밋하고 담백하고 묵직하며 씁쓸한 차의 맛을 즐기게 되었다. 보이차뿐 아니라 아메리카노, 드립커피, 홍차, 청차, 백차, 흑차 등등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 갔다. 사실 젊은 직장인은 차를 마실 여유가 많지 않다. 일단 다구나 차를 구입하는데 들어가는 금액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직장에서 마시기엔 절차가 복잡하고 퇴근 후 밤에 마시기엔 불면의 위험이 있다. 차를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 도구들도 많이 나오긴 했지만, 커피믹스나 캡슐커피의 편리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보이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대체로 50대~60대 이상에 많이 분포되어 있고 은퇴한 사람들이 많다. 한 마디로 시간과 돈이 많아야 차 생활을 부지런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돈과 시간이 없어도 차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다면 나처럼 차에 빠져들 수 있다. 대신 커피 대비 고비용과 저효율에 대한 회의와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차를 일상에 무사히 안착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신선에 준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깜찍하고 아름다운 다관과 찻잔. 물 끓는 소리와 물 따르는 소리. 차의 향기와 맛. 누군가와 함께 마신다면 나누는 모든 이야기는 '다담'이 되고 상대방은 '다우'가 되며, 홀로 마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차만 마시는 행위 그 자체에서 평화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차 마시는 시간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홀로 보내는 시간들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차와 찻잔은 그대와 함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 것이며, 차는 익어가고 찻잔은 낡고 손때 묻은 골동품이 될 것이다.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차를 마실 것이고 아프면 아파서 차를 마실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땐 기분 좋아서 차를 마실 것이고 울적하면 울적해서 차를 마실 것이다. 차와 찻잔은 그대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곁에 둘 수 있는 좋은 벗이 되어 줄 것이다. 그대가 세상을 떠난 후 주인 잃은 차와 찻잔들은 후손들에게 품격 있는 유품으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추운 날씨면 따뜻한 보이차 한 잔이 더없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대자연이 내게 보내는 위로 같다. 사람들에게 차를 권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보다는 커피를 선택한다. 심지어 찻잔과 차를 거저 주어도 커피를 마시느라 뒷전으로 미루다 결국 어딘가에 방치해 두고 마시지 않는다. 차는 커피나 다른 음료에 비해 맛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것 또한 인연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전생의 나는 승려였을까?


보이차 한 편으로 인해 차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차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도 만났다.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던 나의 미각에 담백함과 순수함을 선사했으며, 무의미하게 빈둥거리던 나의 시간을 고요하고 우아하게 채워주었다. 내 인생에 차가 있어 참 좋다. 인복은 없어도 차복은 있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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