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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놀이.

여행 일곱째 날의 기록(2025.1.19. 일.)

by 방구석도인

오늘은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이다. 늦잠을 푹 자고 싶었으나, 조울증 약의 부작용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새벽 세시쯤에 일어나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일정이 없다고 방에만 있기에는 좀 아쉬워 호텔 로비에서 자유로운 영혼들 무리에 섞여서 그 분위기를 만끽해 보고자 로비로 내려갔다.


숙소에는 술과 음식이 제공되는 bar도 함께 운영 중이어서 아침식사로 뮤즐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로비의 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내 옆자리에는 서양의 남녀가 자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베드에 누워 메모도 하고, 책도 읽고, 핸드폰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물론 칵테일과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11박 13일의 일정 중 절반 이상이 지나간 셈이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빨리 흐를 거라고 예상했지만 벌써부터 아쉬움이 앞선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수명이 평균 수명 인 80세라고 가정했을 때, 절반 이상이 지나간 셈이다. 여행에서의 일정을 되돌아보면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인생 또한 특별히 한 것 없이도 시간은 빨리 흐른다. 여행지를 떠날 무렵에는 아쉬움만 남듯이 아마 삶을 떠나갈 때도 아쉬움만 남을 것이다.


여행지를 떠날 때의 아쉬움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서 느낄 수 있었던 자유, 행복, 쾌락을 더 지속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맛있는 것만 먹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갖고 싶었던 물건들을 사며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만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던 날들에 대한 열망도 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면 욕망과 열망과 의무가 조화를 이루도록 조율을 하며 살아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것의 조율에 실패하면 마치 인생의 실패자인양 비난과 자책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난과 자책으로부터 자유로운, 여행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떠날 때 아쉬움이 남을 인생이라면, 어차피 하는 것 없이 흘러가는 인생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볼까.


여행지에서 그러하듯,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미리 계획했다가 그 음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다. 배고프고 밥때가 되었다고 해서 그냥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습관적으로 꺼내 먹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은 음식으로만 배를 채우는 것. 습관적으로 젤리나 과자를 주워 먹지 말고 나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계획적으로 먹을 것.


날씨 좋고 심심하다고 아무 데나 마실 다닐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에만 시간과 돈을 쓸 것. 모임이 있다고 습관적으로 참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모임이거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모임에만 갈 것. 쇼핑을 할 때도 눈에 띈다고 덥석 사는 게 아니라 나의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물건만 살 것.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배가 고파져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캄보디아 누들과 맥주 한 잔을 시켜 점심으로 먹었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메모지에 한참 끄적이다 방청소가 끝날 시간 무렵에 맞춰 방으로 올라갔다. 가슴이 깊게 파인 원피스를 입고 베드에 누워 있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이방인들 틈에서 나는 자유와 고독을 동시에 느꼈다.


방에 잠시 누워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캄보디아의 태양은 뜨겁다. 끈적이는 선블록을 피부에 덧칠하고 싶지 않아 어두워진 후에 야시장을 향해 숙소를 나섰다. 원피스와 모자가 사고 싶었고, 은반지도 좀 더 사고 싶었고, 목이 허전해 목걸이도 사고 싶었다. 저녁 식사는 야시장에서 파는 길거리 간식인 철판 아이스크림과 바나나 팬케이크로 대신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찾아서 뿌듯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초록색의 돌이 걸린 목걸이와 검은색, 파란색 돌이 박힌 은반지는 마음에 쏙 들었다. 모자도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원피스도 내가 찾던 보라색의, 화려한 패턴이었다. 여러 색깔의 구슬이 꿰어진 팔찌도 맘에 들었다.


사는 게 참 별 것 없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고민과 불안은 생각 속에만 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 말고는, 더 할 것이 없다.


여행지의 순간뿐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을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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