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영어 잘하게 해 주세요.
갑자기. 정말, 갑자기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졌다.
교원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안정적인 노후를 맞이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인터넷 강의를 결제하고 교재를 주문해서 공부하고 있던 그 시점에서, 갑자기 한국을 떠나고 싶어졌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고 허황된 생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 마음을 무시한 채, 임용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비행기 타고 저 멀리 떠나 있었다. 도저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은 이미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재외한국학교 교사로 가는 방법, 보육교사로 캐나다에 가는 방법, 미국에 교환 교사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한국학교는 주로 동남아에 있어서 급여가 한국보다 적어서 패스. 누가 그러더라. 동남아는 돈 벌러 가는 곳이 아니라 쉬러 가는 곳이라고. 동남아는 노후에 은퇴비자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캐나다는 최근에 이민법이 개정된 보육교사로 취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미국 교환교사는 3년만 머물 수 있다. 다행히 나는 특수교사다. 특수교사는 미국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부족해서 취업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일단 미국에 교환 교사로 3년을 머물고 영어 실력을 키워서 캐나다에 특수교사로 기술이민 가는 방법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기술이민이 어렵다면 석사 이민이 차선이다. 일단은 영어 실력을 준비하는 게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이미 특수교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굳이 해외까지 나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국에 있는 경우와 해외로 나가는 경우를 수차례 시뮬레이션 돌려 보았다. 이성적으로는, 현실적으로는, 객관적으로는, 한국에서 임용 합격하는 게 가장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AI가 아닌 사람이기에 이상적이고 이성적이며 현실적인 선택만 할 수는 없다. 머리로는 맞다고 해도 내 가슴이 아니라고 하니까. 가슴이 아니라고 하면,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나의 몸은 저절로 임용고시가 아닌 영어 공부를 향하고 있었다.
네이버 검색창에 '천안아산 영어회화'를 검색하니 휴대폰 번호가 하나 떴다. 이 번호는 자신의 남편이라며 일대일 과외를 구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전화를 걸어 보니, 외국인 남성이 한국어로 받았다. 하루에 한 시간씩 주 2회 수업을 한다며, 자신의 오피스텔로 와서 상담을 받으라고 했다. 비용이 얼마냐고 물어보니 참으로 의뭉스러운 답변을 들려주었다.
"괜찮아요. 비용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비용 중요하다고 말하자 비용 안중요하다는 단호한 답변을 다시 한 번 들려주었다.
사실 난 비용이 제일 중요하다. 수입과 지출이 정해져 있는 직장인이기에 너무 비싸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비용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비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대체 어느 나라 계산법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상대가 남성이고 오피스텔로 가야 한다니 혹시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실무원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걱정된다며 그 사람 연락처를 본인에게 보내라고 했다.
천안 오피스텔과 아산 아파트 두 군데가 있는데, 집에서 더 가까운 아산의 아파트로 가기로 하고 어제 퇴근 후 다녀왔다. 긴장감 한가득 안고 외국인 남성 혼자 있는 아파트로 들어갔다. 백인의 금발머리 젊은 남성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들어 보여서 조금은 실망했다(왜 실망했을까?). 머리도 금발이 아니었고 피부톤도 백인의 피부톤이 아니었다. 상대가 남성이라서 걱정했던 건 괜한 걱정이었다. 경력이 이십 년 넘는 전문 과외 선생님 맞았고, 수업 스케줄도 많아서 주 1회 두 시간으로 몰아서 수업하기로 했다. 이야기 중에 수업하는 학생이 와서 상담이 종료되었는데, 젊고 예쁜 여성도 여기서 일대일 과외를 받는 거 보니 믿을만한 과외선생님인 건 확실해 보인다.
이야기 나누다 보니 우리가 만나야 할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영어를 배우냐는 질문에 캐나다 이민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본인이 영국 국적이지만 캐나다에서 17년 살았다면서, 이민 가는 제자들 돈도 받지 않고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특수교사라는 말에 자신의 아들이 자폐라는 말을 하며, 우리 반에 자폐 아이가 있냐고 물었다. 우리 반에도 있다고 했다. 내가 특수교사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을 것이기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이 대목에서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3월 21일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두 시간씩 수업을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배운 영어는 다 잊으라며, 내게 레벨 1의 책을 건네주었다. 유튜브로 미리 예습해 오고, 노트 두 권을 준비해 오라고 했다.
원어민과의 일대일 과외. 비용이 궁금한가?
비용 중요하지 않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제대로 배우려면 일대일 수업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인근 학원도 알아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내 성격상 쭈그리고 있을 것 같아서 과외로 결정했다. 가기 귀찮아서 온라인 수업도 알아보긴 했으나, 온라인 수업이라고 가격이 더 저렴하지도 않다. 일대일로 마주 보고 앉아 눈 마주치며 주고받는 공부가 진정한 공부가 아닐까.
영어 준비 기간을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까지 생각하고 있다. 일단은 영어가 준비되어 있어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회여, 오라. 준비 단디하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