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몬을 아십니까?

구몬 안 밀린 분을 존경합니다.

by 방구석도인

어릴 적에 다들 한 번씩은 해 보았을 법한 학습지 3종 세트로는 구몬과 눈높이, 빨간펜이 있다. 나는 '홈스터디'라는 것을 잠깐 해보았다. 어렸을 때도 안 해 본 구몬을 마흔이 넘어 처음 도전해 보았다. 영어 공부가 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몰라서 구몬을 신청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다.


구몬 영어로 시작해 나중에는 일본어까지 추가해서 월 7만 원가량을 납부했고 이십 대의 남자 선생님이 배정되었다. 같은 직장인으로서 시간을 제때 지키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바쁘고,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굶주려 보이는 어린 구몬선생님이 안스러웠다. 그래서 가끔 간식도 챙겨주고 조금씩 지각하는 것을 이해해 줬더니 30분에서 한 시간씩 늦는 날이 잦아졌고 심지어 교재를 챙겨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구몬교사는 근무환경이 좋지 않은데 노동강도는 높아서 이직이 잦고, 스펙이 훌륭한 분이 있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기에 어차피 교사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교재를 가져다주지 않은 것은 꽤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한다. 학습지는 수업 시간이 짧아 교사에게 교수를 받는 구조는 아니다. 교사의 역할은 교재를 잘 체크해서 전달하고 교재를 풀었는지 확인하고 복습 차원의 테스트를 하는 정도인데, 나의 구몬선생님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확인은 커녕 교재를 가져다 주어야지 풀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어쨌든 일 년 반 정도를 학습했다. 경기도로 이사를 가면서 구몬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선생님의 휴가와 나의 일정으로 인해 전달받지 못한 교재를 전달받는 과정에서도 꽤 트러블이 있었다. 내 이삿날을 몇 번을 말해 줘도 결국 놓쳐서 우편으로 보내고, 우편으로 보낸 교재도 잘못된 교재여서 다시 받는 과정에서 나는 그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불만을 결국에는 폭발시켰다. 내가 폭발하기 전에는 이사 간 지역에서도 구몬 하라며 연락하더니, 후에는 모든 연락을 안 하길래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사람은 안 변하며 잘못을 지적해 봐야 기분만 나빠하고 상대방에게 원망을 돌리지,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배웠다.


구몬교사는 원래 기대가 없었으니 그렇다 치고, 학습자로서 나는 어떠했나. 복습은 둘째치고 일단 구몬을 제때 풀지 못했다. 항상 밀렸다가 구몬선생님 오는 날에 급하게 풀었고, 어떤 날은 미처 못하는 날도 있었다. 너무 많이 밀리면 회복이 불가하여 구몬선생님 동의 하에 그냥 교재를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한 구몬 영어였는데, 회화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저 학교 다닐 때 배운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손에서 놓지 않는 정도의 효과만 있었다.


일본어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가 독일어였기에 일본어는 배운 적이 없다. 전혀 베이스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히라가나를 외운 것 하나 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가타카나는 이상하게 외워지질 않는다. 구몬 일본어 덕에 간단한 일본어 단어를 몇 개 알게 되었고, 일본어를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동기를 갖게 되었으며, 일본에도 관심이 생겨서 작년 여름에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구몬이 일본 회사이기 때문에 일본어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나처럼 전혀 기초가 없는 사람은 마치 '가, 나, 다, 라' 배우는 심정으로 구몬 학습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도 구몬 일본어와 한자는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매일 조금씩 접한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밀려서 한다고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구몬선생님 오는 날에만 공부한다 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단, 통신학습으로 하지 말고 구몬선생님이 오는 방문 학습으로 해야 한다. 선생님마저 안 오면 정말 많이 밀린다.


구몬 영어는 성인학습자에게는 비추천한다. 회화가 목적이라면 학원을 다니는 게 맞고, 독해나 작문, 듣기가 목표라면 차라리 토익이나 토플 같은 공인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회화는 원어민 일대일 과외로 준비할 계획이며, IELTS를 준비할 계획이다. 일본어나 한자도 공인 능력 시험을 준비하려고 한다. 특정한 목표가 있어야 그에 적합한 쳬계적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영어 공부가 하고 싶다, 일본어 공부가 하고 싶다, 한자 공부가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중구난방 공부하면 정말 밑도 끝도 없어진다.


볼펜을 준비해서 테이블에 앉아 구몬을 한 장 한 장 풀다 보면, 내가 학생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학생이던 시절도 떠오르고,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참 하기 싫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도 나왔다. 손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 요즘, 볼펜으로 꾹꾹 눌러 문제에 답을 쓰면 몸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각을 자꾸 해도 구몬을 일 년 넘게 못 끊었나 보다. 아무리 외워도 자꾸 잊어버리는 나의 머리를 한탄하기도 하고, 퇴근 후 밀려오는 피곤과 졸음을 원망하기도 하며 구몬을 풀던 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승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 그래서 구몬을 풀던 시간은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었고,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좀 밀리더라도, 좀 못하더라도 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못난 내가 온전히 수용받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구몬 풀던 시간이 가끔 그립다.


재작년에 우편으로 전달받은 교재를 아직도 못풀었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오늘 풀어 보았다. 학습지는 체계적이다. 단지 내가 체계적으로 밀렸을 뿐이다.


혹시 구몬 하면서 안 밀리신 분이 있다면 댓글 남겨 주기 바랍니다. 밥 사드려요. 존경합니다.

구몬 스마트펜과 영어, 일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