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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새끼네.

원어민과의 영어 과외 첫날.

by 방구석도인

평생을 통틀어 과외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원어민과의 영어 과외 첫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떤 방법과 노하우로 수업을 진행할지도 교사인 나로서는 기대되는 포인트였다. 회화 교재를 하나 선정해서 교재의 단원 한 개를 나가는 방식의 수업이었다. 교재의 문장을 읽으면 선생님이 발음이나 억양을 교정해 주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직접 만든 한 토막의 대화를 노트에 적고 연습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시간에 끝났는데, 문제는 나의 수업 시간은 두 시간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한 시간 씩이나 남았기에 단원 한 개를 더 나갈 것을 예상했지만,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오렌지, 딸기, 바나나, 참외를 깎아 접시에 담아 왔다. 그러면서 나중에 친해지면 요리를 해줄 거고, 수업도 여기서 하지 않고 음식점에 가서 프리토킹을 할 거고, 나중에 이민을 가면 자기 친척이 변호사니 도와줄 거고, 이 책 두 권만 끝나면 영어를 어느 정도 하게 될 거라는 등의 말을 했다.


이런 식의 대화로 한 시간이 흘러갔고 어느덧 나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지, 선생님은 아이패드를 닫고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기며 나에게 돌아가라는 사인을 보냈다. 한 시간 가량의 잡담은 물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내가 프리토킹이 가능해서 영어로 대화를 했다면 수업으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한국어로 떠든 한 시간을 수업이라고 인정해야 하는지 혼란이 왔다. 생전 받아 본 적 없는 나름의 고액(?) 과외를 하는데, 퇴근 후 피곤한 몸으로 귀한 시간을 내어 멀리 운전해서 왔는데 , 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


한국어 잡담 중에 내가 그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수줍게 나의 노트에 '1969'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몇 살 이냐고 묻기에 82년생이라고 했더니 대뜸 나에게 말한다.

"새끼네."

"애기 새끼네."

당사자는 절대 모를 웃음 포인트에 나만 혼자 웃겨 죽을 뻔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사용하는 거 보면 가끔 귀여울 때가 있다.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 다 일 년만 지나면 영어로 프리토킹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 년 지나면 영어 잘한다고 했다. 누구는 캐나다를 가고, 누구는 호주를 가고, 누구는 뉴질랜드를 갔다고 했다. 다음 수업 때에도 또 한 시간 만에 공부가 끝나면 단원 한 개를 더 나가자고 제안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한 시간만 영어 공부하고 한 시간을 한국어로 잡담만 해서는 영영 이민 못 가지 싶다.


한국어 잘하는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평생 한국에 살아야 할 것 같은 원어민 영어 과외였다. 선생님 스스로도 한국인이 다 된 것 같다. 선생님이 한국말을 할 수 있으니 나도 자꾸 한국어만 하게 된다. 덕분에 나의 한국어 실력은 더 좋아질 것 같다. 한국어 능력시험이나 치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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