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새겨진 기억

에세이 주제: 어릴 때 내게 일어난 가장 중대한 일

by mingD

중대한 일이라고 해서 머리로만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보다 두 해 하고도 이틀 먼저 태어난 ‘우리 오빠의 탄생’도 그렇다. 동생인 내게 오빠의 탄생에 대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 기억은 내 몸 구석구석 사방으로 퍼진 신경에 연결되어 새겨져 있다. 이번 설 연휴, 부모님과 오빠 내외와 점심 식사를 하던 중 나는 내 출생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새언니가 임신 6주차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린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식사자리에서의 대화는 예비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의 설레발과 설렘으로 줄곧 채워졌다. 서로 태몽을 꾼 것 같다고 호소하다가, 언니의 입덧 증세로 태아의 성별을 유추해보기도 했다. 태어날 일시도 아직 모르지만 아기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도 고민했다. 사주 이야기는 자연스레 우리 남매가 태어난 30여 년 전으로 흘러갔다. 엄마는 출산 예정일에서 일주일이 지나도 오빠가 나오지 않아 제왕절개 수술을 했었다. 그날로부터 딱 두 해 그리고 이틀이 지나 내가 태어났다. 새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처음 듣는 남매의 탄생기를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듣고 있었다. 나는 끼어들어 오빠의 생일날 합동 생일파티를 해 온 내 어린 시절 역사도 덧붙였다. 생일은 지나서 챙겨주는 건 아니라고 하니, 나름 합리적인 우리 집 문화였다.

“어머니, 아가씨 생일을 오빠 앞으로 하시지...”새언니는 어린 내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내가 이틀 뒤에 태어났으니 억울할 것도 없지’ 속으로 웃으며 흘려 넘기려던 차,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더 좋았겠다 싶어”엄마가 새언니 말에 동조하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태어나는 일시를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둥절하는 순간 이제껏 몰랐던 내 출생의 비밀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과 제왕절개 수술 날짜를 미리 정한 건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그것도‘생일은 지나서 챙겨주는 건 아니라는 원칙’을 고려하여, 오빠의 생일‘뒤’적당할 이틀 차로 선택한 거였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기려던 사람도 없었으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난 왜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몸 속 사방으로 퍼진 신경에 일순간 자극이 오더니, 한동안 잠자코 있던 둘째 콤플렉스가 단번에 깨어났다. 나만 왜 돌사진이 없는가! 왜 나는 레고와 공룡만 가지고 놀았었는가! 왜 엄마는 우리 가족의 연대기를 전부 오빠의 타임라인으로만 기억하는가! 왜 오빠는 반장 해놓고 나한테는 부반장도 하지 말라고 했는가! 심지어는 지금 이 식탁에 놓인 갈비찜이나 잡채 같은 메인 반찬들은 다 오빠 가까이에 놓여있지 않은가! 아무리 서러워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건 알아서 입 밖으로 낼 수도 없었다. 그래 내가 모르는 첫째의 서러움도 많겠지. 아우성치는 응어리들을 억누르려 애썼다. 이 찌질한 둘째의 서러움은 이 사주의 숙명이니 견뎌 내겠노라.


엄마의 변명이 나지막이 이어졌다. “그때는 외할머니도 아들 생일 앞으로 가는 건 아니라고도 하고, 그때도 그런 사상이 아예 없진 않다 보니 엄마도 그렇게 했던 거 같네...”내게 들린 건 엄마의 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보다도 어린 27살 앳된 엄마의 목소리였다. 딸딸아들아들 4남매의 둘째 딸로, 외할머니의 실망 속에 태어났을 우리 엄마가 지닌 서러움도 어딘가 묻어 있는 듯했다. 그 서러움은 엄마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응축된 채 굳어버린 건지, 풀어져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두 남동생을 아직까지도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어떤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날 자극하던 신경 끝에서 가족 사이에 연결된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힘은 내 앞에 있던 2cm도 채 안 되는 태아에게도 생명력 넘치게 뻗쳐 닿는 듯했다.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엄마가 들려주는 우리 남매의 옛이야기로 금세 돌아왔다. 내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들이었다.

이전 01화오케이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