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한 판

에세이 주제: 상징이 들어있는 에세이

by mingD


‘탁’, 반상에 흑돌 하나가 놓인다.
오늘도 아빠는 바둑알 하나를 바둑판에 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 집 컴퓨터는 거실 소파 옆 작은 책상 위에 있다. 컴퓨터는 벽을 보는 방향으로 놓여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아빠는 매일 바둑을 둔다. 바둑은 20년도 더 된 아빠의 유일한 취미다. 내게 보이는 것은 바둑을 두는 아빠의 뒷모습, 그리고 모니터 속 바둑판이다.


‘탁’, 흑돌이 작은 집을 짓고 있다.
내가 중고등학생 때, 아빠 얼굴은 저녁에 식탁에서만 볼 수 있었다. 아빠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곧장 식탁에 앉았다. 밥상엔 김이 나는 흰 밥과 빨간 국물, 거기에 소주 한 잔이 늘 빠지지 않았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아빠가 내 학교 생활은 어떠냐고, 공부는 힘들지 않냐고 내게 물었던 적이 있던가. 아빠는 식사를 마치고선 꼭 바둑 한 판을 두었다. 대국이 끝나면 긴 하품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탁’, 흑돌끼리 연결되며 집을 키워가고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졌다. 난 아직 겨울인데 세상은 너무나 화사한 봄이었다. 난 꼬박 두 해를 집에만 있었다.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뇌 어디가 꼬여서 터져버릴 듯한 머리 속에서 허우적댔다. 기억이 뚝 끊겨 있다. 다만 또렷하게 기억하는 말이 하나 있다. 여느 평일처럼 아빠는 퇴근 후 소주 한 잔 걸치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난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켜두고 눈만 끔뻑이고 있었을 거다.
“걱정할 거 없다. 아빠는 네가 붕어빵을 팔아도 잘 할 거라 믿는다.”
아빠는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다. 그저 가끔 그 말이 떠오르면 한참을 곱씹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실없는 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날 다시 바깥으로 꺼내 준 건 그 말이었을까. 새삼 아빠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탁’, 백돌이 흑돌의 거대한 집을 향해 다가온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아빠처럼 회사원이 되었다. 내 하루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난 단 1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주말엔 본가로 갔다. 난 방에 틀어박혀 내리 잠만 자다가 밥을 먹을 때만 밖으로 나왔다. 아빠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부서 이름은 뭔지, 직장 생활은 어떤지 등 질문을 쏟아냈다. 난 몇 번째 똑같은 설명을 한 후론, 귀찮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직장 생활은 말이다(…)” 말로만 듣던 꼰대가 우리 아빠였다. 그럼 그렇지, 늘 그랬듯 아빠 밥그릇 옆엔 소주 잔이 놓여있었다. 술 냄새나는 아빠의 잔소리는 직장 상사의 꾸지람보다 더 듣기 싫었다. 아빠는 한 손으론 바둑을 두면서도 훈계를 이어갔다.


‘탁’, 흑돌이 쫓긴다.
어느덧 난 제법 신입 티를 벗었다. 연봉만 높은 무능한 상사들을 보고 있으면, 난 저렇게 되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주말에 본가에서 티비를 보다가 대뜸 회사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사내 정치가 웬 말이냐고. 그럴 때면 옆에서 바둑을 두던 아빠는 “그 사람들도 생존하려고 그러는 게다.” 딱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밑엣사람한테 피해는 주면 안 되지!” 난 일은 안 하고 정치만 하는 상사를 떠올리며 발끈했다.


‘탁’, 백돌이 흑돌을 집어삼킨다.
재작년, 난 아무런 대책도 없이 퇴사할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난 붕어빵을 팔아도 잘 할 테니까!’ 정말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빠는 그 해 회갑이었다. 정년퇴직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30년 넘게 한 회사에 다닌 걸까. 가늠조차 안 되는 세월이었다. 아빠는 이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구나!
“걔가 아주 웃기는 놈이라니까” 아빠는 회갑 생신 몇 달 전부터, 어린 후배 ‘걔’ 얘기를 혼잣말처럼 하곤 했다. ‘걔’가 사장한테 연봉을 얼마 이상 안 올려주면 나간다고 했다고, 그래서 사장이 원래는 아빠를 정년 이후에도 연장 계약하려고 했다가 보류하게 됐다고. 아빠는 소주 잔이 채워질 때마다 그 얘기를 반복했다. 바둑을 두다가도 의자를 돌려서 말하곤 했다. 난 그저 아빠의 몸도 마음도 하루 빨리 편해졌으면 했다.


불계를 선언한 흑.
며칠 뒤 아빠는, 사장한테 먼저 ‘연장 계약을 하지 않을 테니 그 친구 연봉 올려주라’고 말했다고 했다. 역시 우리 아빠다웠다. 회갑 생신 날 낮, 아빠는 색이 바랜 노트북 가방에 오래 묵은 짐들을 가득 구겨 담아 집에 왔다. 난 미리 준비해둔 ‘인생 2막을 응원합니다’ 막대가 꽂혀 있는 화분을 선물했다. 선물을 본 아빠는 어딘가 넋이 나가 있었다. 마치, 자충수를 두었다는 듯이.
그날 이후 “아빠가 먼저 그 친구 연봉 올려줘라, 말했지”라고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했다. 한동안 아빠의 복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그때마다 “잘했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아빠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까. 결국 난 퇴사하지 못했다.
연말이면 우리 회사에서도 인사 발령이 난다. 승진한 사람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환호와 축하 꽃다발을 받는다. 이제야 비로소 그 뒤에서 조용히 혼자 짐을 싸는 사람이 보인다. 술 냄새나던 아빠의 잔소리가 떠오른다. ‘그 사람들도 생존하려고 그러는 게다.’


‘탁’, 반상에 흑돌 하나가 놓인다.
백수가 된 아빠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일어나자마자 바둑을 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다. 잠들기 전까지 하는 일도 바둑을 두는 것이다. 두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아빠는 겨울 속에 있다.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때론 초조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매일 아침 텅 빈 바둑판에 놓일 검은 돌 하나를 떠올린다. 한 돌 한 돌 이어가 한때 거대한 집을 지었던 그 바둑판. 무너진 그 빈 곳에 다시 돌 하나를 올리며 선언하는 새로운 시작. 아빠는 다가올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꼭 그러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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