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처음 30살이 되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나이를 먹지 않았다. 공교롭게 그 사이 ‘만 나이 법’이 시행되기도 했지만, 실은 ‘이립’의 문턱을 넘지 못해 시간이 멈춰버린 탓이다. 6시 알람에 잠이 깨면 전날 아침으로 돌아가 있다.
다시 7시 11분 셔틀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갔다. 아침 식사로 계란 2개와 두유 1팩을 받고 곧장 11층 자리로 올라갔다. 컴퓨터 화면이 켜지는 동안 계란을 입에 욱여넣었다.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서는 모니터에 이마를 박았다. 손목이 비틀리도록 종일 키보드를 두들겼다. 밤이 되면, 붙잡힐 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다.
잠들기 전엔 일기를 썼다. 일기는 내 하루를 줄거리로 쓰여지는 일종의 책이었다. 수십 장을 넘겨봐도 같은 페이지였다. 파지 뭉텅이가 되어 점점 굳어갔다. 멈춘 시간 속에서도 나는 이 책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예술가처럼 내 손으로 멋지게 써 내려가고 싶었다. ‘내 인생에도 과연 르네상스가 찾아올까?’ 꿈 꾸면서 잠이 든 것도 그럭저럭 1년이 넘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500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 와있었다.
아직 꿈 속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배에 메고 있는 가방엔 고리마다 작은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자그마치 3개였다. 줄을 달아 목에 건 휴대폰은 긴 스프링으로 청바지 벨트고리에도 연결되어 있었다.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소매치기에 철저한 경계 태세일리가 없지 않은가. 눈을 비벼 댔다. 다시 둘러봐도 피렌체였다. 얼마 전 ‘EBS 다큐멘터리 르네상스 기행’에서 봤던 그 찬란한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나는 꿈일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이 여행의 끝엔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에게서 예술의 씨앗을 훔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가히 ‘꽃의 도시’라 할 수 있었다. 도시는 거대한 하나의 미술관이었고, 수십 개의 성당은 그곳에 전시된 예술품이었다. 그리고 그 예술품 각각은 수천 점의 작품을 담은 또 하나의 전시관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빠짐없이 보기 위해 서둘렀다. 르네상스 대표 건축물인 대성당의 우아하고 거대한 돔 지붕 ‘두오모’를 올라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외벽과 내벽 사이, 1m도 안 되는 폭의 463개 가파른 계단을 올라 꼭대기로 갔다. 다리는 점점 절뚝거렸고, 왼쪽 어깨는 비스듬히 주저앉고 있었다. 팔을 움직이면 가방과 핸드폰과 내 몸 사이를 연결한 줄들끼리 꼬여버리니, 손도 가방에 묶여 있는 듯했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았으니 풀고 갈 시간도 아까웠다. 곧바로 우피치 미술관으로 갔다. 르네상스 문화 예술의 주요 후원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막대한 수집품이 전시된 곳이었다. 수천 점의 작품에서 무엇을 골라 봐야 할 지 몰라 내내 길을 헤매다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허겁지겁 다음 가야 할 미술관을 검색하려는 순간 휴대폰이 방전되어 꺼졌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때부턴 발이 닿는 대로 걸었고, 눈길이 가는 대로 감상했다.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바이올린 연주가 희미하게 흘러나오면, 잠시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낮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베키오 다리를 건넜다. 가파른 경사를 한 20분 정도 올랐을까, ‘미켈란젤로 광장’이라 불리는 높은 언덕 위에 도착했다. 6월의 피렌체는 밤이 늦게 찾아왔다. 8시가 넘었지만 환했다. 야경 사진을 찍기 위해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인파 사이에는,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인 ‘다비드상’ 복제품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본 진품과 조금도 다른 데가 없었다. 단지 어딘가 자유로워 보였고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듯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렸다. 언뜻 보아도 100명은 훌쩍 넘게 젊은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갔다. 원 가운데 한 할아버지가 엉거주춤 춤을 추고 있었다. 빨간 카라티에, 검은 반바지, 주황색 가방. 한 손에는 드럼 스틱을 쥐고 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의 율동 같은 몸짓에 맞춰서 사람들은 다 같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나는 멋쩍게 박수를 치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춤추는 노인을 보는 시선에 따가움은 조금도 없었다. 사랑스러운 눈빛, 하나같이 파안대소하는 얼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모두 연결되었고 몸짓으로 소통했다.
다비드상 그림자 위에서, 춤과 노래는 계속되었다. 그림자는 점점 길어져 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늘엔 어느새 붉은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낮에 힘겹게 올랐었던 거대한 두오모 지붕을 손바닥 위에 올려보았다. 피렌체 도시가 작은 그림이 되어 날 둘러쌌다. 여행 내내 날 옭아맸던 가방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주렁주렁 달린 자물쇠와 지들끼리 꼬여버린 줄은 참을 수 없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이 언덕 위에선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경계심이었다. 가만 보니 가방 안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을 풀어헤쳐 발 아래 두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만들고 있던 원 사이에 내 두 손이 연결되었다. 난 처음 듣는 이탈리아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노래에 맞춰 할아버지의 동작을 따라했다. 그가 한쪽 팔을 올리면 양옆으로 잡은 손이 같이 올라갔다. 행복하게 웃고 있던 그들과 난 분명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한바탕 춤을 추는 동안, 피렌체의 밤은 깊어 갔다.
알람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깼다. 이럴 수가, 다시 그 아침이었다. 7시 11분 셔틀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갔다. 꿈이 너무 달콤했던 탓일까. 추락과도 같은 낙차에 한동안 정신이 몽롱했다. 일기도 한참을 쓰지 못했다. 그냥 이따금씩,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추던 한바탕 춤이 떠오르곤 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로 만들었던 그의 몸짓. 꼭 피렌체 곳곳에 놓여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던 예술작품을 닮아 있었다. 그가 어쩌면 정말 ‘미켈란젤로 할아버지’였을까. 그의 몸짓이 내가 시간여행에서 찾고자 했던 예술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일상을 회복했다. 한동안 멈춰 있던 시간도 이제 조금씩 흐르는 듯하다. 난 조심스레 어줍은 몸짓을 시작했다. 글로 쓰는 작은 몸짓이다. 언덕 위 ‘미켈란젤로 할아버지’의 춤이 떠오른다. ‘나의 몸짓도 언젠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한바탕 춤이 될 수 있을까?’ 새로운 꿈을 꾸며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