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고자 짧은 여행을 떠났었다. 여행하는 2주동안 내 안에 작은 씨앗들이 생겨났다. 마구 표현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내 안을 간질거렸다. 씨앗들은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했다. 뭐라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영 봉오리를 터트려보지 못할 것 같은 조급함이 들었다. 올해 초, 나만의 꽃을 잘 피워내려 ‘8주 에세이 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은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었다. 한 편의 에세이를 메일로 목요일까지 제출하면 선생님께서 미리 첨삭을 해주셨다. 수업 때는 둥그렇게 모여 앉아 각자 제출했던 글을 낭독하는 형식이었다. 글다운 글을 써보는 게 처음이었다. 퇴근하고 노트북 흰 화면만 쳐다보기를 며칠째 반복했다. 수요일쯤 되어서야 뭐라도 쥐어짜서 끄적이고는 목요일 밤엔 울며겨자먹기로 메일을 보냈다. 첫번째 과제를 제출한 후 첫 토요일이 되었다.
“가십과 내러티브의 차이가 뭘까요?” 수업 시작과 동시에 선생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의미가 없는 글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가십거리고, 의미 있는 이야기가 내러티브라고 하셨다. 기분 탓일까, 선생님이 그 순간 나를 쳐다보신 것 같았다. 분명 내가 제출했던 글은 가십임에 틀림없다. 이제라도 메일을 발신취소하고 종이를 뺐어 미제출로 남고 싶었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다른 수강생들이 먼저 낭독을 시작했다. 그들의 글엔 의미가 담겨있었다. 가십이 아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발가벗겨진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글을 읽었다. 얼굴을 차마 들 수 없었다. 이 가십거리로 모두의 시간을 뺐는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에 에세이 수상작들을 몇 편 검색해서 읽어봤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정말 다 하나같이 글에 인물의 깨달음 내지는 변화가 있었다. 이후 과제부터는 결론에 꼭 한두줄이라도 의미를 담으려 했다. 글이 좋아졌다는 피드백을 받은 날은 한없이 기분이 좋아져 내가 쓴 글을 수십번씩 다시 읽곤 했다. 수업 시간엔 선생님 말씀을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필기했다. ‘글의 기본 구조’에 맞추어 문단 수도 맞추고, ‘인물의 감정 곡선’을 따라 사건을 배치하며 내 감정의 y값을 맞추려 애썼다.
머리 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글로 적는 것은 꽤나 괴로웠지만 굳어 있던 마음들에 생기가 돌게 해주었다. 어느새 서로의 글을 나눠 읽으며 울고 웃었던 8번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마지막 날, 강의실을 나가는 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이 수업을 들은 것이었다.
친한 친구에게 글쓰기 수업을 추천해주며 후기를 들려줬다. 가십과 내러티브에 대해 배우고선 내 글에 너무 창피했던 일화도 전해줬다. 한참을 말없이 듣던 친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꼭 글에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데? 왜 그렇지 않은 글은 가십인 건데?”
적어도 수업을 듣는 동안은 내게 그것은 공리 같은 것이었다. 의심해본 적 없었단 말이다. 난 선생님께서 전달하고자 했던 바가 왜곡될까 염려하며 내러티브에 대한 설명을 계속 덧붙였다. 대화는 영화로도 확장되었다. 요새 영화제에서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영화들이 상을 받는 것에도 친구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제일 답답했던 것은,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그 둘의 말을 저항 없이 바로 납득해버리는 나였다. 난 왜 그 공리를 의심하거나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던 걸까. 나를 위해 글을 쓰고 싶었던 건데, 글 속에서 나를 지켜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이야기 말이다.
올 초에 수업이 끝나고 반년이 훌쩍 지날 때까지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무엇을 적어야 할 지 몰라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요즘 다시 조금씩 글을 써보려고 한다. 써야만 하는 이야기가 생긴 건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저 글을 쓰는 동안 나와 나누었던 진솔한 대화들, 사람들과 글을 나누면서 가슴 저릿했던 감정들이 너무 그리워진 탓이다. ‘의미 없는 가십’이라도 써야겠는 이유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들도 어쩌면 그 시작은 늘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