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판이 열리는 순간

에세이 주제: 내가 멋지다고 느꼈던 장면

by mingD


저는 직장에서 동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입니다. 비결이라면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려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언행은 자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제게 어려운 일은 눈치 없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경우일지도 모릅니다.
본디 어렵기만 하던 일도 겪다 보면 ‘별 거 아니네’ 하는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몸 어딘가 깊은 곳에서 키가 자라나는 기분입니다. 성장판은 30대가 되어서도 방심한 틈을 타 종종 열리나 봅니다.


닷새 전 퇴근을 앞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제 남은 업무는 한 동료에게 간단한 요청사항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 앞쪽 한 줄 건너 저와 같은 방향을 보는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종일 내쉬는 한숨소리에 그의 주변으로는 항상 반경 1m 접근 금지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저는 앉은 채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 책상 벽 넘어 뒤통수에 달린 표정을 살폈습니다. 그가 한 손으로 뒷목을 잡고 있는 걸 보니 몹시 예민한 상태였습니다. 이럴 땐, 직접 말로 전달하는 것보단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메신저를 보내는 편이 좋습니다. 그가 업로드했던 파일에 접근 권한을 부여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처리할 수 있게 링크까지 적어두었습니다.

제가 메신저를 보내고 1초나 지났을까요. “아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혀라 진짜.”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꽤 크게 그가 짜증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의 옆자리 동료들이 “왜요? 왜 그러세요. 이번엔 누군데요?” 물었습니다. 에이 설마 저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그럼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가 제 메신저를 확인할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고, 읽었다 해도 고작 한 번의 클릭으로 끝날 간단한 일로 어찌 괴롭혔다고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관심을 끄려던 차에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제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인지 억울해서인지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저요?” 그의 뒤통수가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대꾸 없는 그의 심기불편한 뒤통수에 ‘링크 클릭 한번이면 되는 일’이라고 해명하듯 얘기하곤 곧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애초에 그가 파일을 잘못 올려서 그렇다는 사실은 굳이 꼬집지 않았습니다. 더 말하면 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할 것 같아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몹시 불편해졌습니다. 이 기분은 불쾌함인지 아니면 이유 모를 미안함 때문인지도 아리송했습니다. 이내 여지없이 쉬운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바쁘신데 요청드려 죄송했습니다.’라고 메신저를 보내면 됩니다. 지금 상황이 제가 죄송할 일인지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으니 참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왜 이리도 ‘죄송’이라는 단어가 목에 턱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감정에 솔직하겠다던 새롭고도 낡은 다짐이 마음 한 켠에 남아있었던 걸까요. 다시 한번 스스로 어떤 감정인지 되묻고 살폈습니다. 뒤통수만으로도 그의 언짢은 상태를 감지하면서도, 제 감정에게 대답을 듣는 건 참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 불편함이 미안함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사과하지 말자. 그냥 사과해 버리는 그 쉬운 일을 참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영영 솔직한 사람이 되지 못할 저주에 걸릴 것만 같아 꾹 참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날따라 유독 삐쭉 튀어나온 것 같은 그의 뒤통수를 마주하니 전날의 불편함이 떠올랐습니다. 속이 텅 빈 사과라도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 웬걸! 그가 제 자리로 먼저 말을 걸러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도 제게 사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에 가까웠지만 그럼 어떻습니까. 대화의 물꼬가 저의 ‘죄송합니다’로 트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참 신기하고 낯설었습니다. 서로 멋쩍은 웃음을 남기고 의자를 돌리는 순간 손 끝이 저릿했습니다. 오랜만에 성장판이 열리는 느낌이었을까요? 그렇지요. 어려서 감사인사는 고마울 때하고 사과는 죄송할 때 하는 거라고 배웠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제게도 ‘별 거 아닌 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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