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 여행의 머리말(2)
글로 쓰니까 짧아 보이지 이후 1년을 포함해, 무려 2년 동안 기약 없이 그저 티켓만 가지고 있었다. 재수생이었던 나는 수능에서 예상치 못한(?) 대박을 터뜨리고, 수능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나는 정시 컨설팅의 세계에서 냅다 원서로 수능 점수를 버리게 된다. 공대생이 얼렁뚱땅 의대생이 되고, 학원에서 기획팀 업무를 배워나가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남자친구도 생겼다. 해맑고 철없었던 나는 '괜히 재수해서 집에서 더 멀고 가기도 싫던 의대에 와버렸네.'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묘한 자만심과, 한 학기 동안의 비대면 생활에 대한 권태감과, 컨설턴트의 무성의함에 대한 분노와 함께 다시 반수를 시작하면서 이번엔 진짜로 피폐해졌다. 처음으로 수능 점수에 대해 가져 본 의욕,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과 실력에 대한 자만이 나를 너무나도 괴롭혔다. '왜 정신 차리니까 3번째 수능이지..?' 하는 생각이 들며 막연하게 불안해지고, 재수 때와는 달리 등록한 대학에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절벽 끝에 선 기분이었다. 그렇게 공부하던 와중에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계속 싸우는 일도 생겨서 나라는 사람 자체에서 풍기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도 느껴졌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 티켓이 나와 함께했다.
결국 3번째 수능을 망치고(사실 수능 보기 전부터 느낌이 왔다), 남자 친구와도 너무 힘들게 연애를 이어나가고 있던 2022년 초, 마드리드 콘서트가 결국 7월 말에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쁘고 반갑기도 했지만, 그때쯤엔 정말 거의 잊어버리고 있던 티켓이라 크게 와닿지도 않았다. 사실 솔직히 그때는 매사에 무기력했다. 복학이 2학기인 셈이라서 1학기에 시간이 너무 많았고, 그만큼 긴 자유 시간 동안 여러 고민과 감정에 매몰되기도 했던 것 같다. 지나치게 피폐해진 상태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어느 날은 괜찮았다가 어느 날은 힘들었다가 하는 기간이 반복됐다. 이 외에도 진로, 가족, 우정 등등 모든 삶의 영역이 다 고민거리였다. 글을 지나치게 무겁게 쓰고 싶진 않지만, 그럼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많이 위태로웠던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별생각 없이 잔잔하게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 뇌가 쓸 수 있는 넓지 않은 저장용량과 얄팍한 집중력을 여행 준비가 차지해 버렸고, 몇몇의 고민 그리고 우울은 그 지분을 빼앗겼다. 무기력의 원동력('열린 교회 닫힘'식의 유머 정도로 생각해주시라)은 오히려 멀티태스킹 능력인 건가? 이제 나는 대학, 수능, 아쉬움 같은 10대의 고민은 하지 않는다. 청춘답게! 20대 초반답게! 해외여행 고민이나 하게 된 것이다.
비행기 타기 전의 지나친 회상은 이만하고 탑승 줄을 서보도록 하자. 결국 여행은 내 우울, 아 그 이전의 콘서트 티켓, 아 더 이전의 코로나 휴원, 아 맨 처음의 철없는 재수생 때문에 오게 된 걸로 하자. 비행기 자리가 선착순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닌데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항상 옆 게이트까지 길게 늘어질 만큼 탑승줄을 선다.
P.S. 여러 문제로 괴로워하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의식의 흐름
수능 공부 3년과, 나름 학구열 높은 고등학교에서의 내신 공부 추가 2년(펭수가 핫!하던 시절) 동안 수많은 현대소설을 읽었다. 사실 읽었다기보다는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고 전투적으로 주제 의식을 기억한 과정이었지만, 나름 1900년대 한국 소설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주제의식을 모두 두뇌에 집어넣어 이해할 수 있었다. 격동하는 시대의 그들은 100년 뒤의 우리가 봐도 존경할 만한 고뇌를 했다. 윤동주는 본인의 모습을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반성하고, 박완서나 오정희가 쓰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도시에는 발도 붙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최인훈의 '광장'이냐 '중립국'이냐 '밀실'이냐 하는 어려운 것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요즘 자주 듣는 노래 중, "The World's Smallest Violin"이라는 노래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바이올린의 노래, 바이올린의 고민에도 귀를 기울여줄 관객이 필요하다고 한다. 맞다. 심지어 '전쟁 영웅', '존경받을 만한 소방관'이 아니면 아닐수록 내 고민을 증명해내기까지 해야 한다. 하지만 20대의 고민, 나아가 40대, 50대, 80대의 고민보다 10대의 고민이 사람에 따라 더 무겁고 진중할 수 있다. 또한, 나보다 최악인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도, 가만히 있는 내 고민이 증발해 사라지지는 않으니 머릿속의 윤동주가 자꾸 비웃으려 하면 우물 속으로 아주 그냥 집어넣어 버리자.
작은 바이올린인 나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우울'이라는 감정으로 접근하지 않고 '고민'이라는 문제점으로 접근하는 사고방식이었다.(모든 현대인에게 ‘우울’의 감정이 다소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겁내지 말고,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으니 여기저기에다 '고민 말하기 연주회'를 열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꼭 아는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3교시 영어 영역> 다음을 듣고, 남자가 하는 말의 목적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시오. [2점]
(NOW PLAY>>"The World's Smallest Violin" -by AJR)
① 작은 바이올린 말고 이왕이면 큰 바이올린을 사라.
② 소방관이 되고 싶다.
③ 별 볼 일 없을 수 있는 나의 고민이라도 들어줬으면 한다.
④ 세상엔 나보다 최악인 사람들이 많으니 기운을 내야겠다.
⑤ 내 바이올린이 산산조각(smithereens)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