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 여행의 머리말(1)
해외여행은 철저한 다짐과 준비 끝에 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나도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했다.
스스로도 '과연 나만큼 여행을 준비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고, 주변에서도 '너 또 여행 찾아봐? 이번엔 뭐?'라고 매번 물어볼 정도였으니, 여행 전 반년 동안 내가 얼마나 스페인을 안고 살았는지 참 글을 쓰는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허무하게 수능을 망치고 복학 준비를 할 때, 고등학교 친구들과 예전처럼 자주 보지 못할 때,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일로 스트레스 받을 때,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오히려 여행 준비는 더 탄탄해졌다.
아무래도 여행은 현실 도피가 맞나 보다.
첫 여행의 막이 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가 탈 항공기 앞에 섰는데, 겉으로는 밝게 사진도 찍고 가족들에게 전화도 했지만 너무 긴장돼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에 스쳤던 생각 하나.(전구가 켜지는 것처럼!)
'나 왜 여기 있지? 어쩌다가 이러고 있지?'
'왜 하필 스페인이었던 거야!? 너무 멀잖아..(비행기를 싫어한다.)'
아마도 너무 긴장되었던 순간의 생각인지라 여행의 설렘이 담긴 질문은 아니었지만, 꽤 중요한 질문이긴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왜 스페인에 가기로 했는지 기억하지도 못한 채, 원래 정해진 운명처럼 스페인에 가야 했던 사람인 양, 여행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순간의 기대와 긴장 속에서 차근차근 생각을 돌이켜 봤다.
2년도 더 전인 2020년 3월쯤, 나는 재수학원에 있었다. 별 이유 없이 주변을 따라 시작한 공부였고, 붙은 대학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공부가 하기 싫었을까.. (진짜 철없다)
심지어 코로나가 터져 한 달 동안 학원 휴강한단다. 휴강, 시작할 땐 좋았지만 끝나고 나니 더더욱 공부하기 싫었다. 스스로와의 충분한 대화 없이 시작한 재수 생활은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고, 그럴수록 등록한 대학으로의 복학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의욕을 저하시켰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의 유일한 탈출구는 영국 밴드 One Direction의 Harry Styles.
몇 개월 전 수능 무렵에 알게 된 가수인데, 새로 낸 앨범이었던 'Fine Line'이 충격적으로 좋았다. 이전에도 연예인 '덕질'을 종종 했었기에, 이번 덕질이라고 그렇게 유별난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왜인지 모르게 그가 내 처량한 신세를 알고서 가사를 쓴 것마냥 들리기도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학원에서 15시간가량 늘어져 있던 몸을 이끌고 지나치게 공격적인 은마 사거리 사람들 사이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 알림이 띠링 울리고, 연락이 반가운 재수생 이모양(19)은 바로 핸드폰 화면을 돌리면서도, 공부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게 내용만 확인하고 놔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 잠금화면에서 낯선 아이콘이 보였고, 평소엔 거의 울리지 않던 'ticketswap' 어플임을 보고 헉! 하며 멈춰 섰다.
미리 알림 신청해 둔 해리의 마드리드 투어 콘서트 중고표 판매 알림이었는데, 네덜란드의 아이샤(발음은 한참 나중에 알게 되었다.)라는 분이 VIP존 티켓을 팔고 계셨다. 사실 중고표가 생길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서 기대 없이 깔아 둔 어플이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티켓 대기 중인 인원만 100명이 넘었었다. 기쁨과 초조함에 길에 그대로 멈춰 서서 (내가 차였다면 은마 사거리에서 그날 심한 욕을 한 시간은 먹었을 것이다.) 10분짜리 예약을 걸어두고 바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엄마엄마엄마엄마x100, 나 콘서트 티켓 사도 돼? 수능 끝나고 2월 꺼야."
"얼만데.(대부분의 일에서 엄마의 중요도 1순위 질문)"
"한 14만 원? 유로라서 잘 모르겠어."
"외국 꺼야? 말 같지도 않ㅇ.."
"아 수능 끝나고라니까. 엄마 카드로 한다??"
"하.. 그래라 그럼. 지금 우한폐렴(그때는 코로나보다 이 이름이 익숙했다.)도 난린데 뭔 외국에 나간다고.. 그거 버리는 셈 치고 사라 어? 안보내줄거..1@#%@!#@$"
엄마도 멀리 대치동에서 찌들어가는 나를 알았는지, 10몇만원에 제일 지랄 맞은 딸을 며칠 동안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줬다. 엄마는 길에서 카드번호를 적고 해외 결제를 한 걸 알면 부주의하다고 분명 뭐라 했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중고티켓을 손에 넣었다.
온라인 티켓이라 존재감이 없긴 했어도 그만큼 자주 꺼내볼 수 있던 내 콘서트 티켓은, 언젠가는 가게 될 스페인행 티켓이 되어 재수 내내 숨통을 틔워줬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조차도 스페인에서 실제로 그 티켓을 쓸 것이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너무 매일매일이 힘들었던 그때, 스스로를 위해 준 선물이었지 딱히 재수 이후를 생각하면서 산 티켓은 아니었다. (재수생인 주제에 가고 싶은 대학도 생각 안 해본 마당에.. 이때 모든 종류의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이후에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점점 세상을 지배하게 되고, 공연은 6개월, 1년, 심지어 기한 없이 연기된다. 이제는 콘서트 날짜가 잡혀서 해리가 스페인에 가게 되어도, 내가 스페인에 못 갈 지경이었다. 2021년의 한국(그리고 전 세계)에서 해외여행 갔다는 소리가 나오면 이후 반년 동안 잠정 사회적 왕따가 될 것이 분명하기도 했다. 영미권에서는 인기가 아주 많은 가수였기에 중고 표 티켓값은 점점 올라가게 되고, 아빠는 재수가 끝나고도 티켓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당장 팔라고 주책이었다.
<1교시 국어 영역> 윗글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서술자가 선택한 행동으로 적절한 것은? [3점]
① 뭐가 고민이야! 당장 팔아야지. VIP 티켓이라 80만 원도 받는다는데? 중고표라 공연 정식 취소되면 환불도 못 받아.
②거의 1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은 가지고 있어 봐. 팔기엔 아깝잖아!
해외여행은 철저한 다짐과 준비 끝에 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나도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