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이 흐르듯이, 어쩌다 조지아.

티빌리시와 첫 만남

by 나무


벌써 조지아 땅을 밟은 지 한 달이 다되어 간다. 내가 조지아를 선택했던 이유는 단 세 가지였다. 1) 외항사 오픈데이 2) 비솅겐 3) 아쉬탕가 공인티쳐가 있다는 사실. 세 가지 이유만으로 나는 5월 말, 발칸에서 조지아로 가는 항공편을 찾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발칸 어느 나라에서도 티빌리시행 직항 편은 없었다. 결국 튀르키예를 경유지로 정했고, 계획 없이 날아간 그곳에서 2주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티빌리시로 향했다. 그렇게 온 조지아.


후덥지근하고 무거운 공기가 나의 어깨와 숨을 짓누르고, 공항 근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개들이 어슬렁거렸다. 택시기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조지아어로 호갱을 시도하고, 그렇게 정신없던 조지아의 첫인상이 나를 맞이했다.

나의 성격상 당연히 날씨 따위는 미리 알아보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동남아 같은 기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길, 국지성 소나기가 퍼부었다. 현지 사람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호우였는지, 버스에 탑승하는 사람들마다 비 맞은 생쥐처럼 축축했다.

공항에서 30분쯤 달렸을까. 시티에서 약간 떨어진 광장에 도착했고, 비는 이제 보슬비처럼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사기엔 아까워, 곧장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10분쯤 기다리자 미니밴 정도 크기의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번호가 없었다면 시내버스인지 개인 승합차인지 구분이 어려웠을 정도.

이 버스 역시 현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탑승했고, 연륜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소련 영향으로 나이 지긋한 분들은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데, 나에게 러시아어로 말을 거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내가 아는 러시아어라곤 “스파시바(спасибо)” 하나뿐. 그 말을 연신 외쳐대니, 주변의 무표정한 조지아 분들이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스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주머니와 짧은 동행을 마치고, 사전에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길목은 몇 분 전의 강렬한 폭우로 떨어진 오디와 자두빛 열매들이 폭탄처럼 터져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유지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오르막길을 10분쯤 짐을 들고 올랐을까.

마치 궁전처럼 꾸며진 게스트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조지아행을 결정하고 일정 시간 노동력을 제공하고 숙박을 제공받는 volunteer 프로그램 참여 목적으로 연락을 했던 곳이었다.

튀르키예에 있는 2주 동안은 연락이 미적지근했지만, 일단 직접 가서 면접이든 대면으로 결론을 짓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첫날 숙박지로 정해두었다.


도착하자마자 주인은 나를 알아보듯 반겼고, 그 눈빛은 ‘아, 봉사하러 오겠다고 했던 그 애구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강렬한 눈빛은, 그녀가 독불장군이라는 것을 단숨에 각인시켰다.


짐을 들고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약 90분 동안 그녀는 호스텔 운영 철학, 본인의 열정과 히스토리, 자부심을 쉼 없이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

“나는 웬만하면 지원자를 받고 싶지 않아. 안 좋은 경험이 있어서. 하루에 5시간만 일하려는 여행자가 아니라, 24시간 진심으로 일할 사람을 찾고 있어.”


나는 원래 열정 많은 사람을 선호한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무급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황이다.

그만큼의 열정을 쏟아붓기엔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외관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웠지만 내부는 의외로 비위생적이고 정리가 되지 않은 곳이 많았고,

내가 지금까지 다녀본 게스트하우스 중 손꼽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나 혼자서도 청소나 잡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나는 다각도로 고려한 끝에, volunteer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룻밤만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저녁, 아까 다 쏟지 못한 비가 하늘의 구멍을 뚫고 다시금 대차게 쏟아졌다.

습기와 온도는 더더욱 올라갔고,

지붕 밑에 모여 비를 피하는 고양이들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삼위일체 성당의 황금빛 돔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북적이는 이스탄불에 있었는데, 지금은 고요한 이곳에서 또다시 낯선 풍경 앞에 선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부리나케 짐을 싸 도망치듯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튀르키예에서 만났던 미국인 친구가 추천해준, 구시가지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방이 없으면 어쩌나, 잠깐의 걱정이 스쳤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푸른 눈을 가진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직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방도 없고 빈 침대도 없다고 했다.

나는 플랜 B 없이 왔기 때문에 잠시 멍해졌다.

다행히 그는 거실에서 쉬고 가도 괜찮고, 와이파이도 써도 좋다고 말했다.


카페에서 이 게스트하우스를 추천해주었던 친구에게 연락했고,

그 친구 말로는 여분의 침대가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직원은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모니터를 확인한 뒤 말했다.

“내일부터는 빈 침대가 있어요. 예약하고 싶다면 WhatsApp으로 연락 주세요.”


전날의 폭우 덕분일까, 오늘은 파란 하늘과 강렬한 햇볕이 정수리를 내리쬐는 느낌이었다.

불과 5분 거리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하나 찾아냈다.

하룻밤 6만 원. 혼자 여행 중인 나에겐 부담되는 가격이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전날 게스트하우스를 급히 나와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몸과 마음이 찝찝함으로 가득했다.

최대한 빠르고 가까운 곳에 짐을 풀고 싶었다.

호스트에게 연락해 체크인보다 이른 시간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고, 짐만 보관 가능하다는 대답에 숙소로 향했다.

짐을 맡기고 나서야, 요기를 해결하러 책과 노트 한 권, 펜 한 자루를 챙겨 나왔다.


보도로 4분 거리쯤 되는 태국 식당에서 내가 좋아하는 팟시유를 먹고, 카페를 찾아 움직였다.

손님이 커피값을 정하는 시스템이 있다는 독특한 후기를 보고, 오후 2시의 태양을 피할 겸 그 카페로 향했다.

반지하에 위치한 카페는 생각보다 손님이 없어 한산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는데, 눈에 띄는 커플이 있었다.

백발의 백인 남성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시아계 여성.무슨 관계일까. 궁금증이 스쳤고, 그 옆자리엔 또 다른 아시아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도 나처럼 커플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왠지 그 남자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망설이고 있던 찰나, 백인 여성 손님이 들어와 당황한 듯 커피값을 결정하는 방식에 어리둥절해 하더니,자리에 앉았다.


이 날은 이상하게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이 강했다.

그 여성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휴가차 조지아에 왔고, 남편은 근처 함맘에서 씻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20분간 수다를 떨었고, 곧 그녀의 남편이 도착했다.

그들과 조지아 여행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옆 테이블의 프랑스 여성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나는 여전히, 처음 본 아시아계 남자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끝내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고, 나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건, 그 남자에게 말을 걸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와인 한 잔을 주문하기로 했다. 첫 조지아 와인이었다.


오렌지 와인이 마시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엠버 화이트 와인’ 또는 ‘트래디셔널 조지안 화이트’로 불린다고 했다.

시음을 해보니, 향보다는 알코올 냄새가 강했고 신 식초 같은 느낌도 났다. 점원이 추천한 레드 와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플라스틱 병에 담긴 홈메이드 와인을 건넸는데, 복분자와 포도 주스 중간 정도 맛이었다.

달짝지근한 그 맛은, 더위에 지친 내 몸이 원하던 것이였다.


계산을 하러 갔을 때, 직원이 커피값은 내가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얼떨결에 거짓말을 해 버렸다.

“제가 정해야 해요?”


그 순간,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아시아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응, 네가 마신 커피의 값을 네가 정하는 거야.”


말문이 트였다.

그는 일본인, 도쿄에서 왔고 티빌리시에 산 지 2년 정도 되었단다.

리모트 잡을 하고 있고, 이 카페는 그의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두 아이가 있는 이혼남이며, 조지아에서의 사업 계획까지 털어놓았다.


나는 점점 피로를 느꼈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하늘은 또다시 구멍이 뚫린 듯 비를 쏟아냈다.

숙소로 돌아와 여독을 풀며, 창밖의 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탓일까.

이 조용한 시간이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장을 보러 나갔고,

벨라루스 친구가 추천해준 소시지, 계란, 오이, 토마토, 생수를 사서 돌아왔다.

저녁은 소시지, 스크램블에그, 몬테네그로의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발칸 스타일 샐러드.

그리고 또다시 내린 밤비.


폭우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음이 묘하게 안정되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의 장을 이룬 커피값은 손님이 정하는 컨셉의 카페.
궁전같이 생긴 게하에서 바라보는 황금색 돔.
궁전같이 생긴 첫 날의 게스트 하우스.
마침내 혼자 남겨진 나. 그리고 비.
맑은 하늘. 트빌리시 올드 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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