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와 벽지가 만나는 곳

붙을 것이냐 벌어질 것이냐 그건 지냐봐야 알죠

by 모설이

벽과 벽이 만나는 변.

또 다른 벽과 벽이 만나는 변.

제일 처음 시작한 벽과 마지막 벽이 만나는 변.


그 변들이 만나는 지점.

모서리,라 부르는 그 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릴 때 나는 부모님집과 외갓집, 그리고 할아버지네 집을 번갈아가며 살았다. 구슬픈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복에 겨운 이유였다. 아직 대학생인 아빠와 사회 초년생인 엄마는 육아에는 젬병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외갓집에는 사고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신 눈빛이 다정한 외할아버지와 시간이 남아도는 삼촌들이 드글드글했다. 갑자기 농사에 뜻을 품고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가 그렇게 쉴틈없이 돌아가는 업인 줄 아직 모르실 때였다.


서로 나를 불러다 먹히고, 입히고, 씻기고, 놀아주겠다 하느라 여기로 저기로 옮겨 다니는 시간이 허다했다-고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릴적 사진을 보다보면 그게 진실이라고 믿을 법한 사진이 꽤나 많아서 '어린 나는 제법 행복했겠구나' 하는 호사스런 생각에 빠지는 때가 왕왕있었다. 공원에서 손을 입에 넣고 있는 게 개미를 주워먹고 있는 거라거나, 멜빵바지를 입고 크게 깔깔대고 있는 게 바지에 오줌을 싼 것 때문이라거나, 아빠 품에서 엉엉 울고 있는 게 이 아저씨가 싫다고 발악하고 있는 상황이라거나. 여러 가지로 귀여운 면모가 많은 어린이와 가족들이었다.


세 집의 색깔은 모두 달랐고, 자주 먹는 음식도, 하고 노는 놀이도, 모여있는 모습도 모두 달랐다. 온전치 않은 기억들이 여기저기 기워진 옷마냥 제각각 붙어있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것 하나는 이 모든 순간에 뭔가가 더 필요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정도다. 장난감, 음식, 애정, 손길, 눈빛. 어느 것 하나 모자라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는 특별히 어떤 기억이라기보다는 늘 요란했던 것 같다. 아빠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 작게 차린 분식집은 학생들의 요기를 채우기보다는 취기를 채우는 곳이었던 것 같다. 분식집 안쪽에 작게 마련된 단칸방에는 얼굴이 빨간 삼촌들이 이리저리 널부러진 채로 술잔과 함께 나를 들어올리고 찍은 사진이 여럿이었다.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단편 속 어딘가에는 아빠와 비슷하게 생기거나 다르게 생긴 삼촌들의 요란함이 있었고, 그게 어린 내가 기억하는 아빠와 엄마의 (분식)집의 유일한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고, 할아버지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스쿠터를 타고 다니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각자 방에서 생활하시고, 거의 말을 섞지 않으셨는데 그 덕분에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방을 쓸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주, 할머니 방에 놀러와 나를 괴롭히곤 하셨는데 할머니는 대바늘로 꿰매고 있던 이불 대신 할아버지의 손을 꿰매려고 하실 때가 있었다. 아구구구. 죽는 소리를 내며 뛰쳐나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까르르 웃어주면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를 아주 좋아했고, 버석한 손 끝에 바르시던 바세린을 손가락으로 뭉개는 것도 참 좋아했다.


내가 기억하는 부분부터의 외할머니는 늘 식당일로 바빴다. 식당은 공사장 옆이었고, 그 공사장은 훗날 큰 병원이 되었다. 어쩌다보니 함바집이 되었던 것 같다. 덕분에 할머니는 항상 바빴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외할아버지는 말을 못 하시기 때문에 나와 외할아버지는 종이접기를 자주 했다. 외할아버지는 2중으로 된 종이비행기를 잘 만드셨고, 찢은 달력으로 만든 비행기가 여러 개 만들어지면 내 손을 잡고 옥상으로 올라가 비행기를 날릴 수 있게 해주셨다. 솜씨가 없어 거의 대문 앞에 툭툭 떨어지고 말던 비행기가 가끔 기가 막히게 날아서 골목길 저쪽 끝까지 날아가면, 외할아버지는 앞니가 훤히 드러나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셨다. 다시 비행기를 주워오는 것도 외할아버지 몫이었다. 저녁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 중 누군가는 저녁을 차려주러 외갓집에 오셨다. 그리고 그 할머니들 집에 있는 반찬은 외할머니 식당의 반찬과 항상 같았다.


그렇게 자라고 나서,

한참이 지나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 세 집은 어느 곳 하나도 풍족한 곳이 없었다. 그 시절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유했다 생각했던 어린시절은, 사실 내가 잘 꾸며놓고 보관한 것이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인조가죽 부스러기가 날리는 낡은 앨범을 넘기다 다시 본 사진이 그걸 말해줬다.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장농이 그랬고, 빨갛게 튼 삼촌들의 볼과 손이 그랬고, 포대기 한 자락을 잘라 무릎에 기워넣은 막내 삼촌의 청바지가 그랬고, 나를 업고 기대어있는 담벼락이 그랬고, 아빠엄마의 세간살이가 사진 한 장에 다 들어가 있는 작은 방이 그랬다. 가난의 흔적이 그득한 사진들을 그제서야 제대로 보게 되었다. 다들 없이 살고 있었다. 어려웠고 궁핍했고 모자란 것 투성인 사정이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내 기억에는 전혀 없던 가난이 사실은 그 세 집에 두루두루 잘도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를 불렀던 그 때 만큼은 어느 다른 집보다도 풍족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셨나보다. 좀 지나고 나서는 세 집 모두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난했다 그럭저럭 살만했다 갑자기 반짝 폈다 그러다 다시 가난했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나의 세집살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어디도 내 집은 아니었지만

어디든 내 집이었다.


그리고 내 나이, 삼십삼.

5년간의 외국인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구질구질한 모냥새로 고향집에 돌아가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생각했다.

세 벽이 만나는 곳에 있던 나.

내 삶은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과 청년의 시절을 지나 장년으로 무르익고 있으며, 내 삶의 다양한 모서리를 만드는 벽들과 변들이 교차되고 있다. 누가 모서리가 뾰족하다 하는가? 누가 거긴 벽지가 제대로 붙을 수 없다 하는가? 시간이 지나 풀이 말라봐야 제대로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보이는 그 지점의 이야기가 지금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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