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는 좋겠다

얼굴이 두 개뿐이라....

by 모설이

경쟁자가 전무한 레이스가 어떠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행복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아직 대학생과 사회초년생인 부부의 첫 자녀였던 나는 조부모님께는 '애물단지 막내아들이 처음으로 한 맘에 드는 일'이었고, 외가 쪽에서는 첫 손주이자 첫 조카인 새로운 생명체로 아낌없이 애정을 받으며 살아왔다. 젖병을 물리는 손도 여러 개, 아이를 업은 등도 여러 개, 여기저기 쪽쪽대는 입도 여러 개, 사랑을 가득 담은 눈도 여러 개. 그것의 소중함을 알 턱이 없는 이 생명체는 큰아버지의 두 딸과 먼 나라에 사는 큰고모의 두 아들, 둘째 고모의 외동아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 집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 레이스는 원 없이 행복했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며,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 생명체의 여덟 번째 생일을 한 달 남짓 남겨놓은 어느 추운 밤.


사회초년생이었던 엄마는 이제 제법 시골 새댁의 모습이 어울리는 곱슬머리에 열기구를 연상시키는 길쭉길쭉한 세로줄 무늬의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이었다.


칙칙한 대리석에 하얗게 빛나던 조명 아래에서 가장 아끼는 원피스를 입고 앉아있던 8살의 나는 몹시 불쾌한 마음이었다. 동네 친구들을 불러 얼큰하게 취한 할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고추여 고추!!" 하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파악도 안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소리에 빈정이 상했고, 할머니가 동생 보러 가라며 입혀준 원피스도 다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별 표정 없어 보이던 아빠도 어딘지 모르게 헤벌쭉한 것 같아서 괜히 심통이 났다.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느낌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꼬붕이 생긴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내키지가 않았다.


동생은 외갓집에 가면 둘이나 있는데? 왜 하필 우리 집에도 있어야 하나??!

(8년의 세월 동안 큰외삼촌은 결혼을 하셨고, 두 아들을 낳았다.)


한 번 꼬인 마음은 풀리지가 않아서, 유리창 너머의 작고 빨간 그 생명체가 열 맞춰 누운 다른 애들보다 특별히 못난 것도 아니었고, 그동안 많이 보았던 나의 8년 전 모습과 다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못났다 못났다 소리를 스무 번은 넘게 한 것 같다. 아빠가 한 소릴 하자 더 꼬인 마음에 원피스에 있던 브로치를 뜯어냈다가 원피스에 크게 구멍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구멍이 하나, 크으으으으게 났던 것 같다.


아이는 다 싫어!

쟤가 내 동생이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싫어!!


아무도 믿지 않는 소릴 해댔던 것 같다. 동생이라 유독 싫었던 것, 특히 '남'동생이라 더 싫었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어린 자존심이 발악을 했다. 동생이 기저귀를 잠시 풀어놓은 틈에 오줌을 싸서 싫었고, 젖을 먹으면서 옆으로 반 이상은 흘리는 것이 싫었고, 분유는 먹기 싫은지 뱉어내는 것도 싫었고, 귀엽게 감싸 놓은 강포 안에서 애벌레처럼 꼬물대는 것도 싫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 아빠가, 엄마가, 할아버지가, 심지어 할머니까지도 모두 좋아서 깔깔거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통통한 얼굴이, 접혀있는 살 덩어리가, 작디작은 손과 발이, 가끔 마주치는 까만 눈이 좋았다.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임에도 선연하게 남은 그 싫은 마음은 지금까지도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기분이었고, 가장 치졸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는 그 새 생명을 하루도 더 보고 싶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동생이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참 쉽고 가벼운 사람의 얄팍한 마음을 보게 된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은 아기에서 어린이가 되었고,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하는 해에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동생 손을 잡고 어린이집에 데리고 가는 길이 너무 싫었지만, "누나가 참 착하네." 소리를 들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데려다주었고, 그 길에서도 니가 밉다 소리를 꽤 자주 했던 것 같다. 별 말이 없던 동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등학교를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눈에서 멀어지니 미워하는 마음도 작아졌다. 이렇게 작아지면 어느 날 없어지기도 하겠지. 그러다 또 어느 날 보면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안 좋아지면 말고. 어쩔 수 없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착(하려고)했던 나는, 동생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못된 누나였고, 그건 모두 동생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고,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고, 오토바이를 탔다.

나는 문제없이 자란 내 청소년기를 스스로 칭찬했고, 성인이 되었고, 연애를 했다.

동생은 오토바이 사고로 친구를 잃었고,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동생은 작은 가게를 열었고, 나는 호주에서 돌아왔고, 담배를 피웠고, 삶이 억울했다.

동생은 군대를 갔고, 나는 대학교에 돌아갔다.

동생은 부모님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나는 해외 취업을 했다.

동생은 부모님께 해고당하고(풉. 꼴좋다) 그 옆에서 자영업을 시작했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결혼을 하고 아이 아빠가 되었고, 나는 스타트업에서 5년을 일하고 이제 백수다.


나와 바로 밑에 있던 동생이 이렇게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 그나마 나에게는 예쁨을 받았던 막내는 연년생인 형보다 할아버지를 좋아해서 늘 할아버지의 침대에 누워 생활을 했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교회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 내려와 있어도 동생들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고, 나는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각자 잘 살면 될 일이니까. 니가 어떻게 살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살아도 너넨 신경쓰지 말라고. 그런 야박한 생각을 했었다.


야누스는 문을 지키는 신이었고, 이 쪽과 저 쪽을 다 볼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지키는 신이었고, 사방을 넘어 나를 둘러싼 모든 곳을 방어하느라 수도 없이 많은 얼굴을 만들어내고 나중에는 어떤 것이 진짜 내 얼굴인지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이 많으니 덩달아 눈도 많아서 너무 많이 보았고, 너무 많이 보니 뭘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수 조성모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라고 흐느끼듯 토해낸 그 가사에 마음이 찢어진 사람 중 하나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남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나를 알 수 없어서 긴 시간 방황했고, 그 방황의 세월 동안 심심찮게 괴롭힘을 당한 동생에게 미안할 뿐이다. 이 글이 동생에게까지 닿을 일은 아마 없겠지만, 혹여라도 그럴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사과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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