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하다는 건 누구 기준인가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어디든 속할 수 있다는 것

by 모설이

<그린북>이라는 영화는 높은 평점에 여러 개의 상을 탔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더 감동적이라거나 영감을 주는 영화는 아니었다. 저 두사람, 그렇게 살았구나. 이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한 대사가 한동안 마음을 떠돌았다.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So if I’m not black enough and if I’m not white enough, then tell me, Tony, what am I?”


그렇다. ‘난 뭐지?’라는 질문.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친가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시골 사람이 되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조금 더 큰 시내의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졸업과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시골의 여느 집처럼 먹을 것은 풍족하지만 그 외의 활동을 하는 데에 드는 돈은 턱없이 모자란 집이었다. 그냥 돈이나 벌고 싶었던 내 마음과는 달리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하는 것’에 뜻을 정한 아빠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남의 집에서 살아야 했고, 그건 퍽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처럼 먹어야 하고, 남들처럼 입어야 하고, 남들처럼 놀아야 하는 과정을 습득하는 청소년이 남들보다 공부는 잘하려면 돈이든, 머리든, 노력이든, 근성이든 뭐 하나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없던 나는 그럭저럭 중간을 조금 웃도는 성적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운 좋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시골 쥐의 상경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발생했다.


말로만 하자면 ‘유학’이라 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유흥’에 빠진 철없던 20대는 막상 서울 사람들은 가지 않는 서울 곳곳의 명소를 찾아다니고 종로와 신촌을 오가며 서울의 시끌벅적한 삶을 즐겼다.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뿐인 서울에서 어딜 가든 막내였던 시절. 유흥비는 너댓살 차이가 나던 언니와 오빠들의 지갑에서 채웠고, 또래 친구들과의 커피타임을 채우기 위한 소소한 빵집 알바는 쉬웠고, 챙겨주시는 빵들로 후하게 인심을 쓸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서울에 부모님이 없다는 것.

내 생활과 부모님의 생활이 완전히 분리된다는 것.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의 서울 생활을 부모님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나는 원없이 쏘다니고,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좁디좁은 자취방과 친구네 집을 떠돌며 서울의 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살면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공간이었다. 길을 걷거나 이동을 하거나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어도 온전한 내 공간은 확보되지 않았다. 어깨부터 손, 팔, 다리, 엉덩이가 수시로 다른 사람과 닿을 수밖에 없었고, 나 역시 누군가와 의도치않게 닿는 경우가 많았다. 여름의 끈적한 살도, 겨울의 냄새 밴 코트와 패딩도, 어떤 것이든 마구잡이로 닿아오는 것들은 폭력적이었고, 나 역시 기꺼이 폭력적으로 보답하는 예민한 20대였다. 어차피 시끄러운 데에서 먹을 거라면 밥보다는 술이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바에야, 고스란히 제 갈 길 알려주는 차갑고 쓴 소주를 들이키고 나도 내 소리에 열을 올리는 것이 방법이었다. 우아하고 조용한 자리도 있었겠지만, 나와 친구들의 사정은 녹록치 않아서 우리의 선택지는 왁자지껄한 유흥가의 술집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마저도 서울 생활의 묘미로 느껴졌으니 청춘은 참 대단한 건 확실하다.


시골에는 온전히 내 가족으로 보기 어려운 객식구도 하나 있었고, 서울에서는 온전히 나 혼자만의 화장실이었다면, 여기는 여섯 사람이 써야하니 한 번 드나들기도 심란해 근처의 우체국에 가서 공용화장실을 쓰는게 차라리 맘이 편했다. 그러나 집을 벗어나 5분만 걸어가도 고요했다. 새소리가 들렸고, 바람에 스치고 가는 결에 부딪히는 이파리들의 소리가 들렸고, 어느 노인이 틀어놨을 법한 라디오 소리가 들렸고, 구름마저도 쉬었다 가는 듯 천천히 흘러가는 하늘이 보였다. 끝도 없이 이어진 논들 사이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잠시 몸을 일으키면 열이면 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는 모르는 사람 하나도 없는 작은 동네였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가 한 바퀴 휘- 돌고 오면, 문 앞에는 옆집이나 윗집, 뒷집, 앞집 아무튼 우리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갖다놓은 야채들이 놓여 있기 일쑤였다. 우리집은 팔 데 없는 잡어나 성질이 드러워 딴 놈들보다 먼저 죽어버린 생선들을 나눠드리거나, 명절 때가 되면 전복을 싸게 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논밭 천지인 동네에서는 조금 스페셜한 대우를 받았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서울딸내미”라고 불렀다. 동네에서 서울로 간 게 나 하나뿐이라 그런거라면 영광스럽기라도 할텐데, 그건 아니었고 동네에서 계를 하는 아줌마들의 자식 중에서 제일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 “서울딸래미”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집에 오는 게 더 싫어졌고, 점점 나아지는 집안 사정과 비례해 점점 바빠지는 부모님께 섭섭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불쾌했다. 스물이 넘은 나는 부모님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더 배운 사람, 더 아는 사람, 더 넓은 사람,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래서 좀 잘난 척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잘난 척에는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집에 사람이 없으니 들어줄 사람이 없어 잘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주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고등학교를 다녔던 곳이나 외갓집에 갔다.


친구들은 시골집을 “본가”라고 불렀지만 그 단어가 주는 이질감은 “서울딸래미”만큼이나 어색했다. 원래도 사투리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집에 다녀온 뒤에는 좀 더 신경을 써서 서울말을 쓰곤 했다. 조폭들의 지역이라고 생각되는 전라도의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올라온 나는 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보다는 서울 토박이 친구들이 많았는데,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과 그 부모님들에게 늘 챙겨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집에 넉넉하게 남는 반찬, 명절 선물로 들어온 각종 과일과 캔참치나 햄, 철마다 사는 이불, 어딘가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그릇 등등. 아이템은 차고도 넘쳤다. 타향살이를 하는 나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는 내가 집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살가운 것이라, 가끔은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타고난 건지 학습된 건지 알 수 없는 넉살로 이 집 저 집에 양부모님을 두고 살았다.


친가가 있던 고장에서 산 시간은 10년, 고등학교가 있던 도시에서 3년, 서울에서 10년을 살았다. 나는 결혼을 할지 일을 할지 고민하다, 일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 나라를 떠나 지구 반대편, 직항으로는 연료가 모자라 가지 못한다는 콜롬비아라는 곳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학은 와서 배워도 되고, 실무를 배우면서 아침엔 과외, 오후엔 대학교의 수업을 듣게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은 여러 번 면접에서 탈락하며 난도질당한 심장에 큰 위로가 되었다. 취업비자를 신청하고 기다리는 4개월 동안 연애가 끝났고, 집에 내려가서는 “서울딸래미로도 모자라 외국딸래미 되겠네. 서울 물을 먹어서 용감하네!” 말을 들었고, 친구들은 “촌년이 성공했네. 외국에서 일을 하고~. 부모님이 서운하시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어서 웃었다.


남자친구의 집에서 가까웠던 성북천 옆 8평 남짓의 마지막 자취방에 있던 짐을 가지고 내려가던 날, 엄마는 이미 헤어진 남자친구가 술에 취해 찾아온 모습을 보았고, 조금은 매몰찼던 내 모습에 놀랐고, 집에 내려가는 차 안에서 조금 우셨다. 아빠는 남자는 또 있을 건데 뭐가 걱정이냐고 했고, 엄마는 남자가 없을까봐 우는 게 아니라고 이렇게 또 집도 서울도 아닌 곳에 ‘혼자’ 가는 게 짠해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고, 어디든 사람 사는 덴데 다 똑같지 뭐-라고 부모님에게 말하며, 내 스스로에게도 말했다. 어차피 어디도 내 터는 아니었는데 뭐.


집에 있는 며칠 동안 밥상은 거했고, 어차피 한 번은 쉬었다 가야한다면,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캐나다에서 스탑오버를 하고 친구를 만나 일주일 정도 수다를 떠는 중에도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곳이 내 터가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또 이방인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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