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어렵지만 수림과 상장도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시절이 있었다.
○○씨(상장의 본명, 상장이 왜 상장인지는 다음 화에 설명 예정)
상장과 수림은
처음부터 이렇게 불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둘은 같은 날 입사했고,
같은 교육장에서
같은 클리어 파일과 볼펜을 받았다.
수림은
노트 정리를 잘했고,
상장은
말을 잘했다.
수림이 문서를 만들면
상장이 그걸 들고 가 설명했다.
상장이 먼저 나서면
수림이 뒤에서 근거를 채웠다.
그땐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남기에도 벅찼으니까.
신입 때 둘은
자주 야근을 했다.
사무실엔
형광등 몇 개만 켜져 있었고,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컵라면을 먹으며
상장이 말했다.
“야, 우리 이러다 진짜 여기서 늙겠다.”
수림은 웃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럼
서로 좀 끌어주자.”
그 말은
가볍게 나왔지만
수림은 꽤 진심이었다.
상장이 실수하면
수림이 같이 정리했고,
수림이 막히면
상장이 대표 앞에서
말을 대신해 줬다.
둘은
격의가 없었다.
수림은 생각을 다 말했고,
고민도 다 털어놨다.
“이거, 사실 내가 판단 미스 같아.”
“대표가 알면 좀 피곤해질 텐데…”
상장은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알겠어.”
“내가 잘 말해볼게.”
그 말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는
그땐 몰랐다.
사건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정이 조금 밀렸고, 결과가 완벽하진 않았다.
수림은 그걸 숨길 생각이 없었다.
“같이 정리해서 말씀드리죠.”
상장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냐, 이건 내가 말할게.”
“대표님 성향상 지금은 타이밍이 중요해.”
수림은 그 말을 믿었다.
며칠 뒤,
대표 회의에서
상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부분은 제가 관리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향을 다시 잡았습니다.”
(어!! 지금 뭐라는 거냐? 야, 그게 아니잖아!!)
성과는
‘함께’가 아니라 ‘상장’이 됐고,
과오는
‘과정 중의 시행착오’가 아니라 ‘수림의 판단’이 됐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씨(상장의 본명, 상장이 왜 상장인지는 다음 화에 설명 예정)는
상황 판단이 빨라요.”
그날 이후, 상장은 달라졌다기보다는
자리를 바꿔 앉은 사람 같았다.
같은 말을 하는데
톤이 달랐고,
같은 보고를 하는데
주어가 달라졌다.
“제가 챙겼고요.”
“제가 판단했고요.”
“제가 관리했습니다.”
수림은
그제야 느꼈다.
아,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같은 자리에 서 있진 않았구나.
상장은
위로 올라가고 있었고,
수림은
그 아래에서
받쳐주고 있었다.
어느 날,
대표가 말했다.
“○○(상장의 본명, 상장이 왜 상장인지는 다음 화에 설명 예정) 씨,
팀 하나 맡아보는 건 어때요?”
그 말은
질문처럼 들렸지만
제안이 아니라 이미 통보였다.
수림은 박수를 쳤다. 조금 늦게.
(아 진짜 쌍욕을 해야 할 상황에서 우아하게 박수를 치는 나! 아비투스, 아비투스.)
상장은 언제 연습했는지
겸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더 배우겠습니다.”
대표는
그 태도까지 마음에 들어 했다.
“저런 자세가 관리자죠.”
(관리자…고나리자... 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나. 그대는 고나리자 고나리자 나를 슬프게 하네~~~)
그날 퇴근길,
수림은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건
기쁜 일이기도 했지만,
그 성장이
자기 어깨를 딛고
이뤄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꽤 쓸쓸했다.
(회사생활..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다시 또 평사원으로 들어가.. 회사를 다닐 수가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집 가고 싶어도 출근해야 하는 삶...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수림은
상장을 미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진.
다만
자기가 너무 많이 말했고,
너무 많이 믿었고,
너무 쉽게
‘우리’라고 생각했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수림은 처음으로
이 생각을 했다.
관리자가 된다는 건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말을 골라하는 사람이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일보다는 상황 판단과 자기 설 자리를 살피는 것.
이게 정녕 관리란 말인가?
(목을 뒤로 젖히고 아무리 질문을 해도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