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이라는 말의 의미
화원에게 변화는 갑자기 오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미세하게 위치(아니 어쩌면 지위)가 달라지고 있었다.
회의에서 화원의 질문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메일에선 어느새 참조가 빠졌다.
결정은 늘 회의가 끝난 뒤 공지처럼 내려왔다.
누구도 화원을 나무라지 않았지만
누구도 더 이상 칭찬하지도 않았다.
밋밋한 듯보이지만 이런 미세한 변화들이
회사에서는 빠르게 돌아가는 신호였다.
어느 날 상장이 아주 가볍게 말했다.
“화원 씨, 대표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네요.”
늘 그랬듯 젊은 척, 쿨한 척. 꼰대 아닌 척 완벽한 상장의 말투.
(심플한 말투로 사람 인생 몇 개는 이미 정리하셨겠지…)
수림은 괜한 긴장감에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린다.
지금 자신의 두근거림은
대표실과 무관하고 카페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대표실은 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대표는 잠깐 화원의 이력서를 보고 입을 열었다.
“화원 씨, 일은 참 잘해요.”
이 문장은 대부분의 경우 이별의 서두였다.
“다만 우리 조직이랑 결이 조금 안 맞는 것 같아요.”
결.
1음절이자 1어절인 단어 하나로
질문하는 방식도 문제를 보는 시선도
사람을 먼저 보는 태도도 전부 정리됐다.
결이 맞지 않는다....
“회사도 화원 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서요.
이건 회사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고 화원 씨를 위한 배려입니다.”
말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거절할 자리는 더욱 없어 보였다.
화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잘못은 없어요.”
그게 팩트라서 더 잔인했다.
화원은 일 주일 정도 후 한번 더 대표실을 다녀갔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대표와 화원만 알고 있다.
2차 면담 이후 오래지 않아 화원은 회사를 스스로 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권고사직이었지만 서류엔 ‘개인 사정’이라고 남았다.
회사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안건에 대한 회의로 분주하다.
(사람 하나 정리하는 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는 거구나…)
짐을 정리하던 날, 화원은 수림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죠. 전 아직도 제가 틀렸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수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괜찮아요. 틀리지 않은 채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그 말은 위로였고 작별이었고 어쩌면 부탁이었다.
라면 박스에서 라면 한 개가 빠진 사무실은 다시 안정됐다.
질문은 줄었고 회의는 빨라졌고 상장은 더 편안해 보였다.
“요즘 회의 좋죠? 깔끔하고 생산적이고.”
(아…결이 맞지 않는 사람이 빠지면 회의가 생산적이 되는이 구조…)
며칠 뒤 수림에게도 같은 말이 들렸다.
“대표님이 잠깐 보자고 하세요.”
수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말의 의미를.
대표는 같은 말을 조금 다른 순서로 했다.
“회사를 위한 선택.”
“당신을 위한 배려.”
이번엔 선택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남을 것인가, 스스로 나갈 것인가.
수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할 말 다 하는 게 항상 정의는 아니구나.
회사는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관리가 잘 되는 사람을 원하는구나.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정답은 아니겠지... 여운은 가시지 않는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림은 화원을 떠올렸다.
선 넘던 질문들, 물러서지 않던 눈빛.
그리고
“그래도 제가 틀리진 않았죠”라는 말.
그 말이 이상하게 등을 떠밀었다.
수림은 도망 대신 준비를 시작했다.
할 말을 줄이는 법이 아니라
언제, 어디까지 말해야 살아남는지를.
회사 안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그 준비는 아직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림은 알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장이 가까워졌다는 걸.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