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리지 않았어도 살아남는 법

대표님, 저 잠깐 드릴 말씀 있는데요...

by Growood

10화. 대표님, 저 잠깐 드릴 말씀…


조직과의 이별은 아름다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이간질로 상대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

제보가 들어가기도 하고,


업무 시간에 잠깐 사적인 일을 본 것이 문제 삼아지기도 한다.

동료는 좋았지만 상사를 못 견딘 적도 있고,

반대로
상사는 괜찮았는데 동료가 힘들었던 적도 있다.


나는 계속 다니고 싶은데 조직이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고,

계속 다니라고 붙잡지만 업무량이 너무 많아 적당한 핑계를 대고 관두는 경우도 있다.


연봉이 많거나 정년이나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라면 결정은 훨씬 복잡해진다.


모든 결정 장애의 바닥에는 욕심이 깔려 있음을 인정한다.

손해 보고 싶지 않아서 겁나게 고민하는 마음은

회사도, 직원도 다르지 않다.


수림은 이제 결정이라는 걸 해야 했다.




수림은 사직 집행을 유예했다.
그렇다고 회사에 충성하기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남아 있기로 했다.

자기가 틀렸다는 말에 아직 고개를 숙일 수 없어서였다.

권고사직 이야기는 흐지부지 정리됐다.

대표는 선택을 미뤘고 회사는 시간을 벌었다.

상장은 (겁나 얍쌉하게)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다양한 척을 하며 회의를 주도했다.

“요즘은 다들 예민해서 말이죠. 조직은 플렉시블 해야 오래갑니다.”

그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게 이 회사가 오래 버틴 방식이었으니까.


수림은 예전처럼 싸우지 않았다.

대신 호흡과 함께 필터링을 장착했다.

모든 마음이 성대를 통과할 때 한 번 더 거르기로 했다.

(이건 지금 할 말인가.
이건 내가 해야 할 말인가.
이건 남아 있기 위해
삼켜야 할 말인가.)


화원이 있었다면 바로 물었을 질문,

과거의 수림이었다면 던졌을 의문들을

일단 기록장에 적었다.

말 대신 메모가 늘었고 회의는 조용히 흘러갔다.

상장은 그 조용함이 마음에 든 듯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요즘 팀 분위기 좋아졌죠?”

수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하나 사라졌으니 눈치를 보느라
고요가 찾아온 것인데, 이 고요가 좋은 분위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수림은 더 이상 정의를 증명하려 쓸데없이 용감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지키고 싶은 선을 정확히 알게 됐다.

회사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옳아지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다들 존버 존버 하겠는가.)


그리고 남아 있기 위해선 때로는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하나면 충분했다.

퇴근길에 수림은 문득 화원을 떠올렸다.

질문을 멈추지 않던 얼굴,
그리고 “그래도 틀리진 않았죠”라는 말.

그 말이 회사를 바꾸진 못했지만 한 사람을 바꿨다.

도망치지 않고 버티는 쪽을 택한 사람을.


수림은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도 아니고 완벽한 관리자도 아니었다.

여전히 고나리질은 버거운 영역이라 여긴다.


다만 자기 방식을 전부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 중이었다.


이 이야기는 직장생활 성공담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겨서 올라간 기록도 아니다.

그저 도망치지 않은 기록이다.


회사라는 구조 안에서 숨을 고르며 남아 있었던 시간의 기록.

그리고 수림은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걸.


아무리 힘들었어도, 아무리 눈물 콧물 다 짰어도,

수림의 성장이든

화원의 사직이든

상장의 생존이든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 회사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경력을 쌓았는지.

자소서로 요약하면 200자도 넘기기 어려운 줄거리다.

그 200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 자신을 너무 힘들게 구겨 넣지는 않기로
수림은 결정했다.

내공은 사건 뒤에 쌓이고

이야기는 다음 계절에도 계속될 것이다.


누구나 조용히 숨을 고른 뒤 말을 꺼내는 상상을 한다.

상상을 언제 실현시킬지 고민 고민 고민한다.


“대표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고민은 고민을 낳는다는 걸 알게 된 수림

고민을 없앨 수 있는 것은 행동이다.

고민할 시간에 버티면서 자신의 심신을 돌보기로 한다.

이젠 사직 이후를 상상해도 예전처럼 불안하지 않다.

자신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괜찮아! 더 좋은 길 열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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