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 어떻게 간호사가 되었을까..
나는 원래 간호사가 꿈이었던 건 아니다.
.
아니, 애초에 꿈이란 게 없었다.
잘하는 게 뭔지도 몰랐고,
되고 싶은 목표도 없었기에
미래에 대해 그다지 깊이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그런데 막상 고3이 되어서 학과 선택을 해야 되는 시기가 오니,
안 하던 고민 앞에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워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되고 싶은 "이상향"을 모르겠는 거다.
그저 고민해 봐야 답도 없고,
결론도 늦을 뿐이라
난 그저 내게 맞는 직업을 찾고자 했다..
.
그래서 처음엔,
스스로가 머리보다는 몸을 움직이고 쓰는 데
더 나은 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간호장교"가 되면
적응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 아닌 "착각"을 했더랬다.
나는 그때 "간호" 보다는 "군인"에 더 집중해 있었다.
.
어쨌든 수능시험 보기 전에,
간호사관학교 시험을 치를 수 있으니 떨어진다 해도
수능의 기회는 그대로 남아있어 시험 한번 더 치르는 것쯤은
손해도 아니라고 여겼다
.
하지만,
내게는 간절함이 없었고 당연히 시험에 떨어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작도 포기도 무척이나 빠른 나는
군인이 안되면 그럼 간호사를 해 볼까..
라는 초 단순한 결론에 이르렀다.
.
그때 내게는
어디 학교, 학과를 나오든지 졸업하고 나면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게 중요했다.
나이 먹어서도 여자가 오래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4 남매 중 둘째인 나만이
인문계를 들어갔고, 대학 입시를 치렀으며
9살이 어린 막내 남동생이 있었고
아버지는 엄마보다 11살이 많아 그때 벌써 연로했다.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으로 일찍 자립하는 게 내게는 우선순위였다.
.
스스로 돈을 벌게 되어
막내가 대학 갈 시기 정도 되었을 때,
그 애 학비는 내가 보태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부모님이 조금은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
그 어렸던 내게
"간호학과"는 선택하기 딱 좋은 학과였고,
(마침 나는 "피"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데다가)
어디든 졸업만 하면 취업률이 90프로를 넘는다고 하니
취업전쟁에 시달릴 필요도 없는 완벽한 직업이 아닌가 말이다~!
하면서..
.
고 3 입시 때도 절절하지 않았던 내가
간호학과 들어가서 치열할 리 가 없었다..
내가 봐도 같은 과 동기랑 언니들은
학과 수업, 과제, 실습에 너무 진심인데
정말 갓 스무 살이 되어
서울 살이를 처음 시작해 본 내게는
술 먹고 노는 게 더 쿨해 보였다.
아니,
그게 더 재미있었던 거겠지.
.
나 빼고 모두가 간호학과에 진심인 것만 같았던 그 시절.
말은 안 했지만.
어차피 우린 국가고시에 합격에서 간호사 면허증만
손에 쥐면 어느 병원이든 취업하게 될 텐데~
왜 저렇게 치열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국가고시 시험 하나만 끝나면,
취업 전쟁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나는 IMF의 역풍을 제대로 맞았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으며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
어찌어찌 취업을 하긴 했지만,
그나마도 1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병원은 문을 닫는다 했고,
경제적 자립이 목표였던 이유로
일을 안 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 후 여기저기 떠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
힘들어하던 내게 평택에 살던 언니는
그곳으로 오라 권했다.
작은 병원이라도 너를 써 주는 곳에서 일을 배우고
기회가 올 때 큰 곳으로 옮겨 보자.. 했지만,
시골 몇 군데 작은 병원에서의 경험은
어디 가서 경력이라고 내세우기는커녕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무조건 임상에 투입이 되었던 터라
출근하면서도 내가 무슨 사고를 치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는 졸업 2년이 다 되도록
신규도 경력자도 아닌 애매모호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
간절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했던 동기들과 언니들은
그 와중에 번듯한 병원에 취업해서 자리 잡고
경력을 쌓아 가는 게 보여
그제야 나의 철없음이 안타까웠다.
비교하지 말자고, 다 그들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뿐이라고
나는 내 길을 다시 만들어 가면 된다고 다독였지만,
평택의 그 시골 구석에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
다들 채색이 예쁘게 된 그림 동화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데
마치 내 세상만이 색을 잃어 모든 게 다 회색같이 느껴졌다.
기껏해야 스물몇 살 되었던
정말 꽃 같았던 나이의 나는
내 세상도 언젠간 그렇게 좀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원하고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돼서 좀 더 간호사 일을 제대로 배우게 된다면
그땐, 정말 열심히 살자! 하고..
다짐하고 있었다.
.
그런 목마름이 있을 때,
학교 교수님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중소병원에 취업하게 되었다.
어느 부서 인지도 모르고
그저 일만 하게 해 주면, 시키는 어는 부서든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직도 간호부서로 나를 데리러 왔던
신생아 중환자실 수선생님의 그 환한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이목구비 뚜렷했던 수선생님의 커다란 미소를 보면서
내 인생이 이제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
간절한 뒤에 시작한 거라 그랬는지,
누가 태워도 그게 태우는 건지 몰랐다.
그리고 또 그 외에 사람들은 다 너무 좋아서
그 몇 번 없던 태움도,
"그 정도면 애교였다.."
"그 정도면 추억으로 삼아주지.."
하고 넘어갔다.
.
아직도 간호사는 내게 먹고사는 "직업" 일 뿐이다.
"사명감"이나 "책임감"에 애쓴 적은 없는데
일을 하면서,
내가 돌봐 준 작고 아픈 아기들이
건강해져서 퇴원까지 하게 되는 걸 보니
그게 또 그렇게 보람될 수가 없는 거지!
.
그렇게 내 세상에 색을 채우게 되었다.
간호사를 계속 고집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빛이었다.
.
그러고 보니
결국은 내가 원하는 대로
늦은 나이까지도 일 할 수 있고,
경제적 자유도 이루는 직업을 선택한 게 아닌가.
게다가 하다 보니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고,
나랑 잘 맞기까지 한 일이었던 거다.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한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다.
.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후회가 남을지언정,
충분히 힘을 쏟고 난 일에는 그다지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에게 가끔은 뭘 몰라도 일단은 직진을 해 보라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