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미국 간호사로 살아가기

Q 1; 어떻게 간호사가 되었을까..

나는 원래 간호사가 꿈이었던 건 아니다.

.

아니, 애초에 꿈이란 게 없었다.

잘하는 게 뭔지도 몰랐고,

되고 싶은 목표도 없었기에

  미래에 대해 그다지 깊이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그런데 막상 고3이 되어서 학과 선택을 해야 되는 시기가 오니,

  안 하던 고민 앞에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워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되고 싶은 "이상향"을 모르겠는 거다.

그저 고민해 봐야 답도 없고,

결론도 늦을 뿐이라

난 그저 내게 맞는 직업을 찾고자 했다..

.

그래서 처음엔,

 스스로가 머리보다는 몸을 움직이고 쓰는 데

더 나은 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간호장교"가 되면

적응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 아닌 "착각"을 했더랬다.

나는 그때 "간호" 보다는 "군인"에 더 집중해 있었다.

.

어쨌든 수능시험 보기 전에,

간호사관학교 시험을 치를 수 있으니 떨어진다 해도

수능의 기회는 그대로 남아있어 시험 한번 더 치르는 것쯤은

손해도 아니라고 여겼다

.

하지만,

내게는 간절함이 없었고 당연히 시험에 떨어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작도 포기도 무척이나 빠른 나는

군인이 안되면 그럼 간호사를 해 볼까..

라는 초 단순한 결론에 이르렀다.  

.

그때 내게는

어디 학교, 학과를 나오든지 졸업하고 나면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게 중요했다.

나이 먹어서도 여자가 오래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4 남매 중 둘째인 나만이

인문계를 들어갔고, 대학 입시를 치렀으며

9살이 어린 막내 남동생이 있었고

아버지는 엄마보다 11살이 많아 그때 벌써 연로했다.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으로 일찍 자립하는 게 내게는 우선순위였다.

.

스스로 돈을 벌게 되어

막내가 대학 갈 시기 정도 되었을 때,

그 애 학비는 내가 보태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부모님이 조금은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

그 어렸던 내게

"간호학과"는 선택하기 딱 좋은 학과였고,

(마침 나는 "피"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데다가)

어디든 졸업만 하면 취업률이 90프로를 넘는다고 하니

취업전쟁에 시달릴 필요도 없는 완벽한 직업이 아닌가 말이다~!

  하면서..

.

고 3 입시 때도 절절하지 않았던 내가

간호학과 들어가서 치열할 리 가 없었다..

내가 봐도 같은 과 동기랑 언니들은

학과 수업, 과제, 실습에 너무 진심인데

정말 갓 스무 살이 되어

서울 살이를 처음 시작해 본 내게는

술 먹고 노는 게 더 쿨해 보였다.

아니,

그게 더 재미있었던 거겠지.

.

나 빼고 모두가 간호학과에 진심인 것만 같았던 그 시절.

말은 안 했지만.

어차피 우린 국가고시에 합격에서 간호사 면허증만

손에 쥐면 어느 병원이든 취업하게 될 텐데~

왜 저렇게 치열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국가고시 시험 하나만 끝나면,

취업 전쟁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나는 IMF의 역풍을 제대로 맞았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으며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

 어찌어찌 취업을 하긴 했지만,

그나마도 1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병원은 문을 닫는다 했고,

경제적 자립이 목표였던 이유로

일을 안 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 후 여기저기 떠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

힘들어하던 내게 평택에 살던 언니는

그곳으로 오라 권했다.

작은 병원이라도 너를 써 주는 곳에서 일을 배우고

기회가 올 때 큰 곳으로 옮겨 보자.. 했지만,

시골 몇 군데 작은 병원에서의 경험은

어디 가서 경력이라고 내세우기는커녕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무조건 임상에 투입이 되었던 터라

출근하면서도 내가 무슨 사고를 치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는 졸업 2년이 다 되도록

신규도 경력자도 아닌 애매모호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

간절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했던 동기들과 언니들은

그 와중에 번듯한 병원에 취업해서 자리 잡고

경력을 쌓아 가는 게 보여

그제야 나의 철없음이 안타까웠다.

비교하지 말자고, 다 그들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뿐이라고

나는 내 길을 다시 만들어 가면 된다고 다독였지만,

평택의 그 시골 구석에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

다들 채색이 예쁘게 된 그림 동화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데

마치 내 세상만이 색을 잃어 모든 게 다 회색같이 느껴졌다.

기껏해야 스물몇 살 되었던

정말 꽃 같았던 나이의 나는

내 세상도 언젠간 그렇게 좀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원하고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돼서 좀 더 간호사 일을 제대로 배우게 된다면

그땐, 정말 열심히 살자! 하고..

다짐하고 있었다.

.

그런 목마름이 있을 때,

학교 교수님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중소병원에 취업하게 되었다.

어느 부서 인지도 모르고

그저 일만 하게 해 주면, 시키는 어는 부서든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직도 간호부서로 나를 데리러 왔던

신생아 중환자실 수선생님의 그 환한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이목구비 뚜렷했던 수선생님의 커다란 미소를 보면서

내 인생이 이제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

간절한 뒤에 시작한 거라 그랬는지,

누가 태워도 그게 태우는 건지 몰랐다.

그리고 또 그 외에 사람들은 다 너무 좋아서

그 몇 번 없던 태움도,

"그 정도면 애교였다.."

"그 정도면 추억으로 삼아주지.."

하고 넘어갔다.

.

아직도 간호사는 내게 먹고사는 "직업" 일 뿐이다.

"사명감"이나 "책임감"에 애쓴 적은 없는데

일을 하면서,

내가 돌봐 준 작고 아픈 아기들이

건강해져서 퇴원까지 하게 되는 걸 보니

그게 또 그렇게 보람될 수가 없는 거지!

.

그렇게 내 세상에 색을 채우게 되었다.

간호사를 계속 고집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빛이었다.

.

그러고 보니

결국은 내가 원하는 대로

늦은 나이까지도 일 할 수 있고,

경제적 자유도 이루는 직업을 선택한 게 아닌가.

게다가 하다 보니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고,

나랑 잘 맞기까지 한 일이었던 거다.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한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다.

.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후회가 남을지언정, 

충분히 힘을 쏟고 난 일에는 그다지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에게  가끔은 뭘 몰라도 일단은 직진을 해 보라고 말한다.















.





작가의 이전글 미국 간호사로 살아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