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그림자가 동시에 찾아올 때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내 일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미용 도구를 닦는 손도,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도,
심지어 퇴근길 길가의 카페 유리조차
조금 더 환하게 보였다.
사람이 좋으면, 세상도 따라 예뻐진다.
그때가 딱 그랬다.
그녀와의 대화는
작은 숨결처럼 따뜻했고,
나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무언가가 소중해지는 순간,
사람은 괜히 더 천천히 걷는다.
놓칠까 봐.
⸻
그날,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구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이름.
하지만 성이… 그녀와 같았다.
그녀의 성씨는 흔한 성씨가 아니었다.
“형… 죄송한데… 누나 좀 살려주세요.”
순간, 시간이 멈췄다.
방 안의 웃음소리도, TV 소리도, 술잔 부딪히는 소리도
모두 희미해졌다.
살려달라고?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
달려가는 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코트를 대충 움켜쥐었다.
친구가 “무슨 일인데?” 묻자
입술이 굳었다.
“일단 가야 돼. 큰일 난 것 같아.”
택시 안.
핸드폰 화면에서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동생이 말했다.
“전 남자친구가 데리고 옥상으로 간 것 같아요.”
그 말을 보는 순간
심장이 가슴뼈를 뚫고 나오려는 것 같았다.
추운 겨울밤,
내 몸에서 땀이 났다.
⸻
떨리는 대기
나는 1층 현관 앞에서
말 그대로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3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공포.
그리고…
지켜야 한다는 본능.
나는 남았다.
그냥 서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수백 번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
분노의 순간
그가 내려왔다.
동생이 말한 인상 그대로.
그 순간, 생각할 틈은 없었다.
나는 그의 옷깃을 잡아
근처 놀이터로 끌고 갔다.
숨이 가빴다.
온몸이 떨렸다.
머릿속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여자에게 손대선 안 된다.
그건 인간이길 포기하는 거다.”
그 가르침이
내 주먹에 불을 붙였다.
그날 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그렇게 때렸다.
분노는 이성보다 먼저 움직인다.
그때의 나는
사람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
그녀를 안아준 순간
“그만해!”
친구가 나를 말리는 순간,
현관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눈이 붉고,
입술이 떨리고,
손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뛰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세상은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 순간 알았다.
아, 이 사람을 지키고 싶다.
그날 밤,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게,
가장 치열하게.
⸻
그러나… 그림자는 이미 따라오고 있었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래갈 마음의 준비조차 못 했다.
따뜻했던 겨울밤은
곧 차가운 균열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켜낸 순간이
세상을 잃는 시작이 될 줄은.
그때는 단지 이렇게 믿었다.
사랑이면 다 견딜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그 믿음 속으로 그대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장에서
그 믿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모른 채.